[조미영의 제주마을탐방] (9)기록문화유산 간직한 '인성리'

[조미영의 제주마을탐방] (9)기록문화유산 간직한 '인성리'
전형적 농촌마을… 오랜 역사 유적·자원 활용 과제
  • 입력 : 2018. 07.02(월) 19:00
  • 이태윤 기자 lty9456@ihalla.com
  • 글자크기
  • 글자크기

추사유배지.

대정성 기준 동성리·서성리로 나뉘어
'호적중초' 등 기록사랑마을 3호 지정
추사 김정희 제주 9년 유배지로 유명





대정읍의 가장 동쪽에 위치한 대정고을은 안성리, 보성리, 인성리를 아울러 일컫는 말이다.

조선 태종 16년(1416년) 대정현이 설치되며 성안(城內)이라 불리던 곳으로, 이들 마을의 역사는 같이 흘러간다. 그러나 인구가 늘어나며 동성리와 서성리로 분리되고 1879년 동성리는 안성리로 서성리는 보성리로 개명된다. 이후 1891년 안성리에서 인성리가 분리돼 나가고 1915년에는 구억리까지 분리돼 지금의 안성리가 됐다.

동쪽으로 안덕면과 경계를 이루며 평화로와 우회도로의 분기점에 마을 중심이 있다. 남쪽으로 단산을 바라보며 서쪽에는 모슬봉이 동쪽에는 산방산이 위치하며 취락지구 외에는 대부분 밭과 과수원이다.

안성리 초입에 세워진 표석.

이들 마을의 역사는 고려시대로 거슬러 간다. 고려 충렬왕 25년(서기1300년) 제주를 동서로 나눠 현을 설치할 당시 애월, 한림, 한경지역과 묶여 산방(山房)이라 했다. 이후 조선시대가 돼 삼현으로 분리될 당시 대정현청이 마을 내에 설치되며 대정성이 축조되고 이를 기준으로 동쪽은 동성리, 서쪽은 서성리로 나뉘게 된 것이다.

대정성의 축조는 1418년에 이뤄졌다. 둘레 약 1614m, 높이 약 6m, 폭 3m로 동, 서, 남 3문만 이용했다고 한다. 당시 성안에는 객사동헌, 어변청, 아사, 향사당, 영안관 등이 있었으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성체는 원형을 보존한 곳이 많아 이를 기반으로 일부 복원했다. 대정성 주변의 12개의 돌하르방은 놓인 위치만 바뀌었을 뿐 당시의 모습 그대로이다.

안성리의 대표적 유산은 오래된 기록물들이다. 1780년에서 1922년까지 약 140년간의 마을 생활상을 알 수 있는 호적중초 등의 기록 100여점을 간직하고 있다. 동성리에서 안성리로 개명된 내용이 수록된 호적중초와 호주와 가구수, 가구원 등을 기록한 호구단자, 그리고 송인후를 정3품 통정대부에 임명한다는 칙명, 송계홍을 절충장군 용양위 부호군에 임명한다는 교지 등이 잘 남아있다. 이들 기록물은 서등궤라는 목조 보존함에 담겨있었다.

사람들의 신분을 기록한 호적중초, 통적 등을 특별관리하기 위해 제작된 함으로 4·3의 와중에도 마을사람들의 노력으로 보존된 것이다. 이런 노력의 결과 안성리는 국가 기록원에 의해 기록사랑마을로 지정돼 있다.

길게 에워싼 대정성벽.

기록사랑마을은 마을단위의 역사와 문화를 담고 있는 기록물을 보존하고 이를 전시 활용하기 위해 지정하는 것으로, 전국에 10여개의 마을이 지정됐는데 안성리는 함백역, 파주마을에 이어 3호로 지정돼 있다. 덕분에 이들 문서는 현재 마을회관 내 전시실을 만들어 열람할 수 있게 돼 있다. 좀 더 체계적인 관리와 높은 활용도를 위해 내년에는 '제주도 기록원'으로 승격시켜 나갈 예정이다.

기록마을 안성리.

이와 더불어 안성리는 김정희의 유배지로도 유명하다. 1840년 제주도로 유배 온 김정희는 처음에는 포도청의 부장인 송계순의 집에 머물다가 이후 강도순의 집에 머무는데 이 곳이 현재의 유배지로 지정된 곳이다. 비록 4·3사건 당시 불타버려 원형은 아니지만 고증을 거쳐 복원했다. 9년간의 제주 유배생활을 통해 추사체를 완성하고 국보 제180호를 지정도 세한도를 남김으로써 이 곳이 갖는 의미는 남다르다. 그래서 지금은 그 옆으로 추사관을 지어 그의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안성리는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 대정골의 특산품인 마늘, 감자 등은 물론 감귤 과수원이 주를 이룬다. 오랜 된 마을이라 유동인구도 많지 않다. 인구수도 크게 변하지 않는다. 옆집의 밥숟가락이 몇 개인지 훤히 다 알만큼 마을내 공동체는 돈독하다. 다만 젊은이들의 일자리가 많지 않고 마을 내 고령화가 심화되는 게 고민이다. 하지만 안성리에는 희망이 있다. 오래된 역사가 다져진 유적과 자원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 잘 활용한다면 발전 가능성이 크다. 큰 난리에도 기록물들을 잘 보존했던 지혜와 경험을 모아 마을의 미래를 만들어가길 바란다.





"후손 위한 기반 마련해야"



조근배 리장.

예전에는 안성, 인성, 보성리가 하나의 마을이었다. 그래서 대정성이 이 마을들에 걸쳐져 있다. 이를 구분해 역사를 이야기 할 수 없다. 대정향교, 송죽서원, 대정서당 등에서 학문을 같이 익히고 추사 김정희와 동계 정온이 유배 와서 머물다 간 곳이다.

다만 우리 마을의 경우 서등궤에 보관됐던 호적중초가 있어 기록사랑마을로 지정된 것이 다른 점이다. 4·3의 와중에 건물들까지 다 불타버렸는데 어르신들이 이것만큼은 잘 지켜냈다. 지금은 이렇게 마을회관에 비좁은 전시실에서 전시를 하다 보니 기록물 전부를 전시할 수가 없다. 그래서 정부에 건의해서 건물을 새로 짓기로 했다. 내년에는 '제주도 기록원'으로 새롭게 단장해 제대로 된 전시실을 갖추게 될 것이다. 그리고 제대로 된 보존을 위해서는 전문적인 관리를 받으며 습도와 온도 등을 맞춰야 하는데 이를 마을차원에서 하기는 어렵다. 지방 정부가 적극 나서서 이를 관리 활용하길 바란다.

그렇게 되면 현재의 추사관과 연계한 관광자원화도 가능할 것이다. 현재 추사관을 찾는 관광객이 연간 10만명이다. 이들에게 우리 마을의 기록물도 같이 관람하게 하면 더 좋을 것으로 본다.

대정지역의 경우 개발의 혜택을 못 받은 편이다. 덕분에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들이 많다. 이는 개발할 곳이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를 기반으로 미래의 후손들을 위한 계획을 세워야 한다. 대정현성과 추사관 그리고 대정지역의 일제강점기 유적 등을 묶어 관광벨트화를 만들어 관광객들이 머무는 곳으로 만들어야 한다. 여기서 머물고 먹고 즐길 수 있어야 하는데 지금은 추사관만 보고 가버리는 형국이다. 이러면 우리에게 낙수효과가 없다. 젊은이들의 일자리를 만들어 주기 위해서는 머무는 관광이 될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개발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안성, 보성, 인성리가 모두 협력해서 나서야 한다. 원래 한 마을이었으니 잘 협심할 수 있으리라 본다. 행정에서도 이런 점에 신경 써 주길 바란다. <여행작가>
  • 글자크기
  • 글자크기
  • 홈
  • 메일
  • 스크랩
  • 프린트
  • 리스트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밴드
기사에 대한 독자 의견 (0 개)
이         름 이   메   일
6853 왼쪽숫자 입력(스팸체크) 비밀번호 삭제시 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