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사람 이방익 표류현장을 가다Ⅱ] (4)항주

[제주사람 이방익 표류현장을 가다Ⅱ] (4)항주
옛 도읍 흥망성쇠 기억하는 대운하… '항주의 혼'에서 쉼표
  • 입력 : 2019. 08.13(화) 00:00
  • 진선희 기자 sunny@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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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주~북경 운하 1797㎞ 길이
"번화한 물색 다 기록 어려워"
송환 표류민들도 잠시의 여유
도심엔 6세기 후 형성된 서호

중국 절강성(浙江省, 저장성)의 성도인 항주(杭州, 항저우). 기원전 589년 항주란 이름이 처음 사용되었다. 기원전 907년 오월국이 항주에 수도를 세웠고 남송 역시 마찬가지였다. 항주시 관광위원회에서 발행한 안내 책자에는 송나라 소동파 등 저명한 문학가와 인연이 있는 곳으로 약 1271~1275년 무렵 중국에 온 '이탈리아의 여행가 마르코 폴로'가 거쳐간 사실을 소개했다. 항주는 이제부터 제주 사람 이방익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지금의 대만 표착후 고향으로 송환되는 여정에 이방익 일행이 항주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항주 시내에 남아있는 대운하. 중국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문화유산 중 하나로 경제, 문화 교류가 이루어진 물길이었다.

"초 8일 항주부에 도착했는데 여기는 절강 순무부가 있는 곳이다. 강 좌우에 화각이 영롱한데 녹의홍상을 입은 여인들이 누상에 올라 악기를 연주하고 혹은 노래를 부른다. 강물을 성안으로 끌어들여 성문으로 연결해 놓으니 성내의 화각들이 더욱 기이하게 보였고 수많은 배들이 강구에 왕래하는데 경쟁하듯 뱃놀이를 즐기면서 날이 저무는 것도 잊고 있었다."

이방익은 '표해록'에서 1797년 음력 4월 8일 항주에 당도한 심경을 잊지 않고 적었다. 기행 가사 '표해가'에도 배안에서 밤을 지새우고 항주부로 들어갔더니 여인들이 '녹의홍상 무리지어 누상에서 가무한다'며 화려한 도시의 첫인상을 담았다.

'평설 이방익 표류기'의 저자인 제주 권무일 작가는 잠시 유유자적한 이방익의 항주 체류기를 읽고 "고향에 돌아가려 가슴이 타들어가는 표류객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그만큼 이방익 일행이 번화한 항주의 모습에 빠져있었다는 말이겠다.

서호를 관람하는 유람선이 주변 풍경과 어울려 그림같은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다.

항주에는 만리장성과 더불어 중국의 문화를 상징하는 유산이 있다. 이방익 일행도 북경으로 향하는 동안 경유했을 대운하다. 2014년 6월 중국에서 마흔여섯 번째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대운하는 항주에서 북경에 이르는 길이가 총 1797㎞에 이른다. 2500여년 역사를 지닌 세계 최고(最古)의 인공운하로 4개의 성(省)과 두 개의 시(市)를 지난다.

대운하는 강남지방을 관통하며 경제와 문화 발전을 이끌었다. 양자강 아래로 대운하가 흐르는 절강성, 강소성, 상해 일대는 강남수향(江南水鄕)이라 불리며 사방에 수로가 펼쳐져 있고 이를 통해 활발한 물류 유통이 이루어졌다.

항주시는 대운하가 거치는 노정에 역사고적이 흩어져 있고 문화 숨결이 풍부하다며 자전거로 돌아볼 수 있는 코스까지 만들었다. 그 물길은 수천년에 걸쳐 고도(古都)의 흥망성쇠와 서민들의 다양한 일상을 지켜봤을 터, 항주 대운하 주변은 아침과 낮, 야간의 풍경이 저마다 다르다.

"천주산은 동편에 있고 서호강은 서편에 있고 선당은 남편에 있으니 산천도 광활하고 물색도 번화하다. 한없는 경개를 눈으로 보거니와 다 기록하기 어렵구나."

이방익이 머물던 청나라 말기 상업거리를 재현한 항주시 청하방역사문화거리. 절강성의 성도로 번화했던 흔적을 보여준다

이방익의 항주 감상기는 계속된다. 200여년 전 그의 행적을 따라 절강성에 발디딘 탐방단도 항주를 찬찬히 둘러봤다. 그 중심에 '항주의 혼'으로 불리는 '서호(西湖)'가 있었다.

6세기부터 형성된 서호는 항주시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로 매년 수천만 명이 찾는다는 명승지다. 서호를 다녀간 이들이 그 아름다움에 놀라 물고기와 기러기도 숨고, 달도 꽃도 부끄러워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항주서호문화경관'은 201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서호는 처음부터 호수는 아니었다. 전당강(錢塘江, 첸탕강)의 지류가 퇴적 작용을 일으켜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자연과 문화의 아름다움을 겸비한 오늘날의 서호가 되었다. 그중 서호의 일출과 석양은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풍경을 그려낸다. 서호는 며칠 혹은 몇 주의 시간을 두고 돌아봐야만 그 모습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예정된 일정이 기다리고 있는 탐방단은 다음 여정을 위해 마냥 시간을 내어줄 수 없었다. 이방익이 그랬듯, 아쉬움을 안은 채 서호를 떠났다.

자문위원=권무일(소설가) 심규호(제주국제대 석좌교수)

글=진선희기자

서호 홍보 엽서. 서호를 대표하는 이미지 중 하나다.



300여년 먼저 항주 거친 최부
궁금증 취재하며 대운하 기록

이방익보다 먼저 항주에 체류했던 조선 사람이 있다. '표해록'을 남긴 최부(1454~1504)다. 제주에 경차관으로 부임했던 최부는 부친상을 당해 1488년 윤 정월 3일 일행 42명과 고향 나주로 향하다 큰 풍랑을 만나 표류한다.

명나라 때 절강성 남쪽 해안에 표착한 최부는 항주에서 북경까지 대운하를 따라 이송된다. 148일만에 조선으로 무사히 돌아온 그는 성종의 명을 받아 '중조문견일기(中朝聞見日記)'를 작성했는데 이것이 다름아닌 '표해록'이다. 최부 표해록은 6종의 판본이 전해지고 있고 일본에서도 번역 출간됐다.

최부의 눈에 비친 항주도 훗날 이방익처럼 화려했다. 저자에는 금은이 쌓여있고 사람들은 비단옷을 입었으며 사계절 시들지 않는 꽃이 피어 항상 봄과 같은 곳이었다.

특히 그는 중국 남과 북의 가공 물자가 오고갔던 대운하에 대한 기록을 상세히 적었다. 체운소(遞運所)에서 갈아 탈 배를 기다리는 동안에 호송하던 관인들에게 궁금한 점을 묻는 등 적극적 취재를 통해 나온 내용이다.

"갑이라는 것은 양쪽 기슭에 돌로 제방을 쌓습니다. 두 기슭 사이의 간격이 가히 배가 한척 지나갈 만큼 좁게 만들고, 넓은 판자로 물 흐름을 막아 물을 모아둡니다. 판자의 많고 적음은 물의 깊고 얕음에 따라 다릅니다. 또 나무다리를 제방 위에 설치해 사람들이 오갈 수 있게 합니다."

물길을 거쳐 무사히 북경까지 다다른 최부는 대운하 이용의 편리함을 다음과 같이 썼다. "이 강의 수로가 아니었다면 기구한 만 리 길에 온갖 고통을 겪었을 것인데 지금 배 가운데 편안히 누워서 먼 길을 오며 전복의 근심을 알지 못했다."

진선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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