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일보] 사람들은 사이다를 원한다. 속이 뻥 뚫리는 명쾌함이 없이는 이 불투명한 세상을 살아가기 너무 힘이 들어서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원인과 결과가 정확하게 전달되어야 한다. 그것이 창작자의 의무이고 관람자의 당연한 쾌감이다.
그래서일까. 조목조목 작품을 분석하는 콘텐츠가 인기를 끈다. 쉽게 정의 내릴 수 없는 내 감정의 실체를 타인의 지식을 통해서라도 서둘러 확인해야 하기 때문이다. 답답한 것은 참을 수 없는 불쾌함이 되고 애매모호한 것은 더 이상 미덕이 아닌 시대다. 그런데 과연 그렇게 밝혀낸 한 개의 사실은 모든 감정의 해답이 될 수 있을까.
쥐스틴 트리에 감독의 영화 '추락의 해부'는 제목 그대로 '한 남자의 추락사를 둘러싼 수많은 의혹들을 낱낱이 해부하는' 작품이다. 유명한 소설가 산드라는 눈 쌓인 산장에서 시각장애를 갖고 있는 아들과 안내견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산드라를 인터뷰하러 산장에 손님이 찾아왔던 어느 날 산드라의 남편이 산장 앞마당에서 추락한 사체로 발견된다. 산드라는 집에 있었고 아들은 안내견과 함께 산책에 나섰던 차였다. 산드라는 유력한 용의자가 되고 아들과 안내견은 목격자가 된다. '사고였나, 자살인가, 살인일까…'라는 영화 포스터의 홍보 문구처럼 이 죽음은 한 가지 이유로 특정하기가 어려워 보인다.
한 남자의 죽음으로 인해 네 식구의 단출한 일상은 순식간에 무너지고 유명 작가에서 살인 용의자가 된 산드라의 명성 또한 빠르게 금이 간다. 영화는 무려 두 시간 반이라는 러닝 타임 동안 이 죽음의 실체를 파헤치기 위해 다양한 각도에서 인물들을 들여다본다.
인물들은 타인 앞에서 진술하고 해명하고 읊조리고 울부짖고 자책하고 비난한다. 사건을 추적하는 지난한 과정에서 모든 이들이 헐겁게 비틀거리기 시작한다. 누군가의 삶은 너덜거릴 정도로 젖어버리고 떨어지기 직전의 위태로움으로 연명하는 삶은 조금도 안전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촛불이 꺼지고 나서야 완전해지는 어둠처럼 결국 사실은 밝혀진다. 그런데 가냘프게 흔들리던 불 하나를 끄고 나서야 온전해지는 실체라는 말은 얼마나 쓸쓸한가. '추락의 해부'는 한 사람의 죽음을 에워싸고 있던 관계의 겹들이 벗겨진 자리마다 휑하니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을 관객들로 하여금 감각하게 만드는 영화다.
어쩌면 이 작품의 다른 제목으로 '관계의 부검'이라는 말도 썩 어울리지 않을까. 세 명의 사람과 한 마리 개라는 산드라의 단출한 가족 안에서 싹트고 영근 관계의 열매들이 추락해 파편과 흔적으로 끈적이던 시간들이 죽음이라는 하나의 사실, 그 폐부에 자리 잡고 있다. 그 실체를 마주하는 일은 어쩌면 우리라는 여러 개의 몸을 이루고 있던 미세한 입자들을 목구멍으로 다시 넘기는 의식일 수도 있겠다. 삼키기에는 이미 늦었지만 뱉을 수 없는 삶.
<진명현 독립영화 스튜디오 무브먼트 대표(전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