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월교에서 동북쪽으로 1∼2km 정도 걸어가면 황사평 천주교 공원묘지가 나타난다. 커다란 소나무들이 분위기를 자아내는 주변에는 수백기의 묘지들이 넓은 묘역을 채우고 있다. 이곳은 제주역사의 비극적 사건을 반추케 하는 역사의 현장이다. 신축교난(이재수란)의 아픔을 간직한 곳이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1백년 전인 1901년 이재수가 장두로 나선 봉기군은 제주성을 함락 시킨 뒤 천주교도 등 수백명을 관덕정 앞 광장에서 참수했다. 이 것은 국제문제로 비화됐고, 당시 프랑스 출신인 구마실신부의 요청에 의해 두척의 군함을 제주에 파견했던 프랑스측은 이들을 매장할 공동묘지와 배상금 등을 조선정부에 요구했고, 조정은 이를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약속 이행은 지연됐고, 시신들은 제주읍에서 가까운 별도봉과 화북천 사이 기슭에 버려지듯 묻혔다. 그 후 프랑스 공사가 조선정부에 이 문제의 조속한 해결을 요청하면서, 1903년 4월 황사평을 공동 안장지로 양도받게 됐다. 당시 별도봉 밑에 임시로 묻혀있던 피살된 교인들 중 연고가 있는 분묘는 이미 다른 곳으로 이장해 간 상태여서 무연고 시신 28구만이 이곳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천주교공원묘지로 사용되고 있는 면적 규모는 약 1만8천평으로 신축교난 당시 시신은 물론 성직자와 평신도들의 안장지로 사용되고 있다. 1984년 황사평공동묘지를 공원묘지로 조성하면서 울타리 석축공사와 성상들을 건립하게 됐고, 1995년 11월 선교 1백주년 기념사업준비위원회가 이곳에 기념비를 세우기도 했다. 현재 공원묘지로 조성된 황사평 일대는 이재수란 당시 제주성을 공략하기 위해 동군이 장기간 집결했던 곳이어서 이재수란(신축교난)과는 밀접하게 관련된 역사의 현장인 것이다. <저작권자 © 한라일보 (http://www.ihalla.com) 무단전재 및 수집·재배포 금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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