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섬 속의 섬을 가다 (7)무인도(차귀도) 제주섬의 서쪽 맨 끝이다. 차·귀·도. 예부터 전죽(대나무)이 무성해서 ‘탐라순력도’의 ‘한라장촉’ 등 고지도에는 죽도(竹島)라고 알려진 무인도다. 최근에는 생태학적으로나 종 다양성 면에서 매우 주목받는 곳이다. 한국에서 가장 남방성이 강하며 희귀 해산 동·식물의 보고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차귀도는 과연 무인도 였을까. 이 섬의 고고학적 환경은 베일속에 묻혀 있다. 차귀도 바로 앞쪽은 고산 자구내 포구다. 한반도 최고의 초기 신석기 유적이 자리한 고산리 한장밭과 연결된다. 신석기 유적의 발상지인 곳이다. 제주 선사인들은 기원전 1만년을 전후 이곳에서 처음 섬문화의 싹을 틔웠다. 무인도로만 알려진 차귀도가 관심을 모으는 또 하나의 이유이기도 하다. 차귀도에는 고고학적 흔적이 없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 지난 14일 취재팀은 이 섬을 찾았다. 취재팀이 집중 조사한 곳은 죽도. 차귀도를 이루는 세개의 섬 가운데 가장 크다. 조사에는 고고학자인 고재원씨(도민속자연사박물관 연구원)와 북군 문화재 담당인 강관수씨가 함께 했다. 취재팀은 이날 중요한 고고학적 유물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섬의 선착장. 자구내 포구에서 출발한 어선이 잠시 정박하는 자그만 포구다. 대부분 토기편인 유물들은 선착장을 만들면서 형성된 단애면에서 확인됐다. 탐라시대 전기의 곽지리식 적갈색 토기편이다. 이 토기는 기원후 2세기를 중심년대로 한다. 무성한 숲을 이룬 전죽 사이에서도 곽지리식 토기의 바닥편이 노출돼 있다. 지표상 나타나는 유물의 집중도는 다소 미약하지만 조사에 따라서는 더 확인될 가능성도 있다. 무인도로만 알려진 이곳에서 탐라시대 전기의 유물이 확인된다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출토유물로 볼때 적어도 기원무렵부터 고대인들의 생활무대였음을 알 수 있다. 유물 분포지가 자구내 포구와 가장 가까운 곳이라는 점도 시사적이다. 차귀도는 자구내 포구에서 가깝게는 3백m, 멀게는 2km 가량 떨어져 있다. 유물의 집중도로 볼때 고대인들은 장기거주 보다는 주로 일시적인 캠핑성 어로생활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지만 그 시기는 더 올라갈 수도 있다. 이유는 무엇일까. 고산리 초기신석기 유적에서 유추할 수 있다. 고산리 유적 형성 당시는 현재의 해수면과는 양상이 매우 달랐다. 지질·지리학자들은 7,000년전 무렵까지도 우리나라 서해안의 평균 해수면이 현재보다 6.5m 가량 낮았던 것으로 본다. 4,000년전에는 3m 정도 하강했던 것으로 분석한다. 현재의 차귀도 주변의 수심이 2m에서 70m 정도인 점을 볼 때 당시 신석기인들이 이동할 수 있는 환경은 충분했을 것이다. 이 섬에서 고산리 유물이 출토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취재팀은 또 섬의 남서쪽 절벽 아래 바위틈에서 길이 75㎝, 폭 58㎝, 두께 19㎝의 자그만 표석을 찾아냈다. 아무렇게나 내동댕이 쳐진 이 표석에는 ‘통수로(通水路) 좌세종(左世宗) 강치용(姜致龍)’ 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통수로’는 ‘물통으로 다니는 길’이란 뜻이다. 20세기 초 이 섬을 처음 개척한 좌세종 강치용 두 사람이 이곳 속칭 ‘징게돌이’ 해안가에서 샘물이 솟아나는 것을 발견 표석을 세운 것이다. 또 하나 시선을 사로 잡은 것은 몰방에. 몰방에(연자매)는 섬 가운데 잡풀속에 윗돌과 아랫돌 1쌍이 놓여 있다. 20세기초 고산리 사람들이 이 섬에 이주 생활하면서 직접 곡식을 장만할 때 사용하던 것이다. 무인도로만 여겨졌던 이곳에서 몰방에는 전혀 예상치 못한 맞닥뜨림이다. 그야말로 살아있는 박물관인 셈이다. 무인도로 알려진 차귀도는 적어도 기원무렵부터 고대인들의 생활터전이었다. 뛰어난 경치는 보물섬임을 실감케 한다. 하지만 아름다운 풍경의 이면에는 역사의 상흔도 있다. 자구내 포구 일대는 여몽연합군과 삼별초 사이에 전투가 펼쳐진 곳이기도 하다. 차귀도에 많이 나는 전죽은 당시 화살대용으로 사용됐다. 이 섬은 아직까지는 원시 그대로의 비경을 간직하고 있다. 당국에서도 섬 보호를 위해 고심하고 있다. 그렇지만 성급한 정비계획은 오히려 섬을 망칠 수도 있다. 인위적인 간섭을 배제하는 것, 그것이 최선의 보호책이다. -차귀도는 어떤 섬? 행정구역상 북제주군 한경면 고산리 산 34번지 일대에 속한다. 죽도와 와도(臥島) 지실이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약 60만년전 화산활동에 의해 형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죽도는 동서 길이 1.72km, 남북 0.7km, 면적이 10만5천1백45㎡이다. 와도는 죽도와 자구내 포구 사이의 섬으로 면적은 5천58㎡. 자구내 해안가와는 3백m에 불과하다. 또 2천2백81㎡ 크기의 지실이섬이 죽도와 바로 붙어있다. 고지도 상의 죽도가 차귀도라 불리기 시작한 것은 호종단의 전설에서 유래한다고 전해진다. 호종단(胡宗旦)은 중국 송나라 시대의 복주(福州)사람. 풍수에 능한 지관이다. 고려 예종(1106∼1122) 연간에 제주섬에 와 중국을 넘보는 유능한 인재가 나오지 못하도록 지맥과 수맥을 끊고 귀국하던 길에 차귀도 바위사이에서 죽었다. 한라산의 수호신이 매로 변해 날아와서는 폭풍우를 일으켜 그가 탄 배를 침몰시켰기 때문이다. 호종단의 귀국길을 막았다는 뜻에서 이 때부터 ‘차귀도(遮歸島)’라 했다고 한다. 차귀도는 아열대성 해산 동·식물이 다수 서식하고 있을뿐 아니라 수많은 보호종 및 한국미기록종이 발견되는 등 생태학적으로나 종 다양성 면에서 매우 주목되는 곳이다. 이 때문에 문화재청에 의해 천연기념물 제422호로 지정보호되고 있다. 북제주군에서도 섬의 중요성을 감안 내년부터 토지매입과 함께 체계적인 보호에 나설 계획이다. /이윤형기자 yhlee@hallailbo.co.kr [사진설명]당산봉에서 바라본 차귀도 전경. <저작권자 © 한라일보 (http://www.ihalla.com) 무단전재 및 수집·재배포 금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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