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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의 역사
[키워드]마한과 백제교류
입력 : 2003. 01.22. 12:25:05

서기 3세기경 중국기록에 ’주호(州胡가) 마한 서쪽 큰 섬에 있어 중한(中韓)과 배를 타고 교역을 한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 교역 세력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원거리 무역을 담당한 주호사회 내에서 신분적으로 우월 집단으로 보아야 한다. 이 세력의 주인공은 원거리 교역을 통해 얻어진 철기, 유리 등의 귀중품이 제주시 용담동 고분에서처럼 그들의 부장품으로 선택되는 것이다. 게다가 마한 지역에서 유행했던 옹관묘의 채택, 곽지패총 5지구에서 발견되는 경질찰문토기호, 외도동 유적에서 확인되는 연질타날문토기 등이 교역을 통해 수입된 중한의 물건들이다.
 백제와의 관계는 서기 476년 문주왕 2년 기록에 출발한다. 이때는 백제가 매우 어려운 상황으로 전개되는 시기여서 탐라국주가 사신을 보내 굳이 조공할 이유가 없는 시기이다. 이 기록의 내용을 분석하면, 탐라국왕의 대외적 지위와 대내적인 권위가 더욱 높아짐과 동시에 양국간의 관계가 더욱 밀접하여진 사실을 반영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이때 받은 관직명은 서기 676년 신라가 당을 완전히 몰아내고, 중앙집권 체제를 강화한 신라 전성기인 경덕왕 시기까지 보인다. 이러한 사실은 백제와의 밀접한 관계를 입증하고 있으나 고고학적 증거로 제시하기엔 너무나 유물이 빈약하다. 금성리 석축유구에서 확인된 직구연질호, 약간의 수확용 농기류, 손칼, 그리고 종달리패총에서 발견된 철기류가 있을 뿐이다. 앞선 시기 마한과의 교류 유물보다 전반 이하로 줄어드는 양상을 보인다.
<강창화·제주문화예술재단문화재연구실장· kchanghw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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