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덕면 동광리 소재 원물오름은 서부지역의 중간지점에 자리잡고 있어 한림과 한경, 안덕과 대정지역을 조망하기에 적당한 오름이다. /사진=강경민기자 gmkang@hallailbo.co.kr 원물오름·감낭오름 안덕면 동광리 소재 원물오름(院水岳)과 감낭오름은 한림과 한경, 안덕과 대정지역을 조망하는 데에 적합한 오름이다. 서부지역의 중간지점에 위치한 오름으로 서부관광도로를 따라가다 동광검문소에 가기 전에 도로 변 서북쪽에 나란히 있다. 안덕면 충혼묘지를 거쳐 가면 올라가는 길목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충혼묘지 바로 옆에는 물통(연못)근처를 어슬렁거리는 말들이 보인다. 여기에는 크고 작은 3개의 물통이 단단하게 쌓여져 있는데 원물이라는 오름 이름만으로도 예부터 이곳에 있어왔던 물통인 것으로 짐작되어진다. 이곳의 간판을 들여다보면 대정원님이 제주목을 다녀오다가 물을 마시고 갈증을 풀었다고 해서 원물(院水)이라고 일렀다고 알리고 있는데 여기서 원(院)은 역참제도와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옛날 교통 요충지에 설치된 역(驛)·참(站)의 기능을 하는 원(院)은 마을이 형성되지 않은 곳에 관리들이 머물 수 있는 시설이다. 조선시대 태종 16년(1416년)에 제주목, 대정현, 정의현 등 3읍으로 나누어진 이후, 제주목∼대정현을 잇는 도로는 관덕정을 기점으로 해서 제주향교 앞∼오리정(현 제주국제공항 위치)∼정존(현 노형동)∼광령∼서원(현 애월읍 상가리 원동마을)∼동광∼인성리(대정골)에 이르렀다. 동부노선인 제주목∼정의현 사이 중간지점에 동원(‘길섶나그네’ 자리)이 있었듯이 서부관광도로 원동마을에는 서원이 있었다. 그런데 원물오름 기슭에도 원이 있었다면 제주목∼대정현 사이에는 두 개의 원이 있었던 셈이다. 지리적으로도 서원과 원물오름은 제주목∼대정현 사이를 대략 3등분한 지점이다. 그리고 동광마을 주변에 광평참이 있었다고 하니 더욱 추측을 낳게 한다. 올라가는 길목에서 동쪽을 향해 가니 감낭오름이 나지막하게 자리 잡고 있다. 동북사면 일부만 소나무 등이 군락을 이루고 있고 대부분은 동광목장 방목지의 기능을 하는 초원이다. 여기서 보면 4·3의 아픈 사연을 간직하고 있는 잃어버린 마을 터 서너 개가 한눈에 들어온다. 남쪽에 펼쳐진 넓은 평지는 화전마을이었던 무등이왓이다. 그리고 사장밭, 조수궤, 삼밭구석, 간장리 등 모두 5개 자연마을이 옹기종기 앉아 있었는데 이 중 간장리만 복구되고, 나머지는 마을 자취가 희미해지고 있다. 무등이왓은 방성칠의 난의 진원지로도 전해지고 있다. 발길을 돌려 원물오름을 올랐다. 감낭오름보다 다소 높은 원물오름은 주변 시야에 막힘이 없다. 그래서 일제강점기의 막바지인 1945년 일본은 원물오름을 관동군 111사단의 지휘본부로 삼았다. 해안지역의 산방산, 송악산, 가마오름, 당산봉 등의 일선 부대를 지휘하기에 안성맞춤이었기 때문이다. 계곡형 분화구를 가진 원물오름은 우마들의 방목지로 오름 전체가 초원을 가지고 있다. 바위들이 박혀 있는 북봉, 남봉 능선 끝 지점에는 진지동굴이 있었는데, 역시 가장 조망이 잘되는 곳이다. 최근에 함몰된 것으로 추정되는 진지동굴터가 오름 사면에 입을 벌리고 있었다. 오름을 마구잡이로 뚫어 만들어졌던 이러한 진지동굴 흔적을 그냥 방치해도 되는 것인지 걱정스럽기만 하다. 삼나무와 해송 조림지를 지나 한림과 안덕 경계에 있는 당오름으로 향했다. 목장용지를 지나는데 땅이 질퍽질퍽하다. 축분 액비를 목장용지에 살포한 흔적이다. 축산분뇨 냄새가 지독하거니와 과연 이러한 액비를 중산간 목장에 살포할 경우, 토양이 영양분을 흡수하는 것인지, 아니면 오염이 되는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다. 생소한 외래식물도 이 속에서 자라고 있어 탐사단의 발길을 무겁게 한다. 하지만 목장 한 가운데 꽤 규모가 있는 못이 하나 있는데 이름이 아름답다. 주변 묏자리 비석을 읽어보니 ‘버들못(柳池)’이었다. ‘관설목장 연구’ 논문에서 확인해 봤더니 7소장 감낭오름 일대 초원에 방목됐던 우마들에게 매우 소중했던 수처(水處)중의 하나였다. 버드나무가 있었던 못이었을까? 방치돼 있었지만 지금도 자연미의 운치가 느껴진다. 보존해야 할 목장경관 중 소중한 요소임이 틀림없다. /특별취재팀 [탐사포커스]院이란 고려∼조선시대 츨장관리들이 쉬어가던 숙소 고려 말 이래 지방에 출장나가는 관리들을 위해 마련한 숙소다. 조선시대 경국대전과 대전회통 등에 기록돼 있다. 육지부에선 역참제도가 크게 발달했다. 도시나 마을이 형성된 곳에는 역(驛)과 참(站)이 설치되고 마을이 형성되지 않아 출장 간 관리들이 숙식을 해결하지 못하는 지점에는 원을 두었다고 한다. 그리고 강 도선장에는 도(渡)를 지정했다. 원은 원칙적으로 각 지방 30리마다 원사(院舍)를 두고 숙박소로 삼았다고 한다. 수령이 여러 고을을 순행할 때 원사에 둘러 점심을 해결하거나 마필을 교체하기도 했다고 문헌은 전하고 있다. 도내에는 10여개의 원(院)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이 중 조선시대 3읍을 연결하는 도로에 위치한 東院(濟衆院)과 西院(利往院), 의귀원·중문원 등이 대표적인데, 대부분 원 설치 후 나중에 마을이 형성됐던 곳으로 추정되어진다. 원을 제대로 운영하기 위해 그 부근에서 거주하는 사람 중에서 원주(院主)를 선발하여 관리토록 했다. 경국대전과 대전회통에 의하면 원주에게는 대로상의 원이면 1결(結·5000평내외) 35부(負), 중로이면 90부, 소로이면 45부를 름전(쬎田)이라는 이름으로 지급, 경작토록 허용했으며 부역을 면제해 주었다.원물오름 입구에 있는 물통. 과거에 이곳에는 출장가는 관리들이 숙식을 해결하던 원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전문가 리포트]귀화식물 왕도깨비가지 원물오름, 당오름 및 정물오름일대는 일부의 해송림을 제외하면 대부분 초지로 이루어져 방목이 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목장(牧場)이 위치하고 있는 지역이다. 이들 초지에는 유럽지역 원산의 귀화식물이며 로제트(rosette) 형태를 지닌 개민들레(서양금혼초)가 높은 빈도로 덮여 있는 것을 쉽게 관찰할 수 있다. 또한 겨울에도 방울토마토 모양의 노란 열매가 달린 가지과(科) 식물인 왕도깨비가지(Solanum ciliatum)가 분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왕도깨비가지는 지난 2000년 이후부터 성이시돌 목장 및 동광일대 빈터에서 관찰되는 종으로 남아메리카지역이 원산인 귀화식물(歸化植物)이다. 일반적으로 귀화식물은 인간 활동에 의해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으로 이입된 외래식물이 야생상태로 된 식물을 의미한다. 즉, 인간이나 동물, 화물 등의 매개에 의하여 해외의 자생지로부터 국내에 유입되어 야생상태가 되거나 정책에 의해 수입된 재배종이 야생에 일출(逸出)된 식물을 총칭한다. 이러한 귀화식물은 도로변, 부두 등과 같이 사람이나 화물이 많이 왕래하는 곳이나 개발이 이루어진 대도시 주변과 농경지 등에 대부분 분포한다. 그리고 목장지대는 목초지를 개발하기 위하여 외국 초종(草種)의 씨를 수입하면서 다른 종의 종자가 섞여 들어와 귀화가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현재 제주도내에는 200여종의 귀화식물이 분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들 귀화식물에 대한 연구는 아직 기초단계 수준에 있다. 그러므로 각각의 귀화식물 종의 정확한 이입경로나 자연생태계에 미치는 영향, 자생종과의 경쟁관계, 유해 외래식물이 인간에 미치는 영향, 농업이나 축산업 등 산업에 미치는 영향, 귀화식물이 유용식물로서의 개발 가능성 등에 대한 연구가 요구된다. 이는 앞으로 외국과의 교역 증대 등으로 외래식물의 이입기회는 더욱 늘어날 것이고 도시화 등에 따라 생육장소의 확대가 초래될 가능성 높아 이에 따른 외래종의 관리전략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고정군 탐사위원(한라산연구소/지질분야)> <저작권자 © 한라일보 (http://www.ihalla.com) 무단전재 및 수집·재배포 금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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