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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탐사
[大河기획/한라산 학술 대탐사](239회)
제2부 한라대맥을 찾아서(73)
바다·오름이 한데 어루어진 풍광 ‘백미’
입력 : 2005. 04.15. 00:00:00

▲‘한라대맥’의 끝점인 수월봉은 맨 동쪽 우도봉에서부터 먼 길을 걸어 온 탐사단을 반갑게 맞아주는 듯 했다. /사진=강경민기자 gmkang@hallailbo.co.kr

당산봉·수월봉

 ‘한라대맥을 찾아서’ 마지막 탐사다. 그야말로 오름과 바다가 한데 어우러진 한라대맥의 끝점인 당산봉과 수월봉은 먼 길을 걸어온 탐사단을 아늑하게 반기는 듯했다.

 당산봉(당오름)을 탐사하기 전, 신창성당과 용수포구를 차례로 찾았다. 해안도로 개설로 접근이 쉬워진 용수포구(절부암·節婦岩)는 한국 최초의 천주교 신부인 김대건 일행이 1845년 9월 28일 표착한 곳. 천주교 제주교구는 지난 1999년 이곳을 표착성지로 선포하고, 당시 김대건 신부가 중국 상하이에서 타고 온 라파엘호를 복원하였다.

 라파엘호는 신창성당에 임시 보관돼 있어 탐사단은 먼저 성당에 들렀다. 길이 13.5m, 폭 4.8m의 목선으로 전형적인 한선(韓船)이다. 라파엘은 여행자의 주보(主保)를 뜻한다. 이 목선은 2개월 후면 표착성지인 용수성지 박물관에서 볼 수 있게 된다.

 탐사단은 해안도로를 이용하여 용수포구로 향했다. 박달목서 자생지이기도 한 용수포구는 아담한 숲이라고 할까. 이 숲속에 절부암이 있는데 강사철((康士喆)과 고씨부인의 애틋한 사랑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앞바다에 떠있는 죽도(차귀도)에 대나무를 구하려 간 강사철이 바다에서 실종되었다. 시체라도 찾으려던 고씨부인은 낙심하여 포구에 와서 목을 매니, 남편의 시신이 바위곁에 떠올랐다는 것이다. 아내의 순절, 하늘나라에서의 재회에 감동한 마을사람들은 강사철과 고씨부인을 당오름 남쪽 양지바른 기슭에 함께 묻었다. 1867년 당시 판관 신재우(愼栽佑)는 고씨가 목맨 바위를 절부암이라고 이름지었고, ‘업무 강사철 처 고씨’ 표절비(表節碑)를 무덤앞에 세웠다. 이 이야기를 뒷받침하는 무덤과 비석이 지금도 남아 증언하고 있으니 제주의 대표적인 로맨스인 조명철과 홍랑의 사랑이야기가 그러하듯이 이러한 유적들은 허니문 투어의 테마로 만들어 봄직 하다.

 당산봉을 탐사하려고 북동쪽 능선에 접근하는 코스를 이용했다. 해안쪽 능선을 따라 오르는 코스는 당산봉을 잘아는 오르미들만의 숨겨둔 코스였다.

 당산봉은 예로부터 당(차귀당)이 있었던 데서 연유된 이름이다. 당오름이 정확한 듯한데 보통은 당산봉이라고 부른다. 바다를 뚫고 나온 응회구에 속하는 당산봉은 동북쪽으로 터진 말굽형 분화구를 하고 있으며 그 안에는 새끼 오름이 솟아 있다. 처음 수중 분출된 후, 육상 환경에서 분화구 내부에 새로 화구구(火口丘)가 생긴 이중식 화산이다. 해안쪽 코스에서는 가끔 쉬었다 출발하는 것이 필수다.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빼어난 풍광이 발아래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자구내 포구와 차귀도, 그리고 용수포구에 이르는 드넓은 풍광에 풍덩 빠진 듯하여 아찔하기도 한다.

 능선을 따라 올라가니 전경초소가 가로막는다. 당산봉수가 있었던 자리였는데 이제 전경초소가 버티어 일반인의 왕래를 통제하게끔 되어있다. 작은 목소리로 소리치면 대원이 나와 문을 열어 통과할 때까지 안내해주었다. 다시 급경사를 오르다면 커다란 바위를 만나는데 일명 거북바위라고 하는데 그 위에 올라 고산지경의 넓다란 평야를 바라보는 맛이 그만이다. 한장동은 그 평야 끝점인 수월봉 남쪽에 설촌된 마을 명이다.

 그런데 고산 한장동에서 신도리에 이른 해변을 대야수포라고 주장되어지곤 한다. 여기서 대야수 해변이 이쪽이었다면 바로 그 곳이 하멜이 표류한 곳이라는 것이다. 이는 이익태 목사의 지영록의 기록에 근거한 것으로 ‘64명이 탄 배 한척이 대정현지방 차귀진 밑 대야수연변에 부서져, 빠져 죽은 자가 26명, 병자가 2명, 생존자 36명’이라 했다. 과연 하멜이 1653년 7월 24일 바로 눈앞에 보이는 고산 한장동 해안에 표착한 것이 진실인가.

 이어 수월봉을 자동차로 가볍게 올랐다. 제주섬의 서쪽 땅끝이다. 물위에 떠 있는 달과 같다하여 연유된 이름이라는 얘기가 있다. 전에는 고산이라고 불려 오다가 1910년 오위장군 고지남(수월공 고지남)의 숭모비가 세워지면서 수월봉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향토지의 기록도 있다. 주민들은 노꼬물(녹고물)오름이라고 한다. 여기에는 수월이와 녹고라는 오누이의 애틋한 사연이 전해져 내려온다. 홀어미니의 병환을 고치려고 누나 수월이가 오름 중간에 오가피를 캐어 동생에게 건네주다 떨어져 죽었다. 바위틈에 흐르는 녹고물은 누이를 부르며 한없이 흘리던 녹고의 눈물이라고 한다. 수월봉 오갈피는 제주에서 나는 약초 중에 특산인 탐라 섬오갈피이다. 주로 해변 산지 또는 한라산의 계곡이나 숲속에 드물게 자라는 관목이다.

 남북으로 길게 가로누워 있는 수월봉은 표고가 78m. 수월봉은 오름 중에 화산활동에 의해 쌓인 여러 현상을 관찰할 수 있는 귀중한 학습현장이다. 절벽에는 층리가 뚜렷하고 크고 작은 암석들이 떨어져 만든 탄낭(bedding sag)이 있다. 화산활동이 얼마나 격렬했는가를 짐작하게 하는 지질구조이다.

 한라대맥의 끝점을 연상케하는 것이 또 하나 있다. 차귀도 섬 사이에 뾰족하게 서 있는 바위를 주민들은 영실 오백장군의 막내라고 한다.

/특별취재팀



[전문가 리포트]고산마을의 영산(靈山)

 고산마을에는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두 개의 오름이 있다. 다름 아닌 자구내 포구를 중심으로 동서로 자리잡고 있는 당산봉(당오름)과 수월봉(高山)이다.

 수월봉과 당산봉은 수성화산(水性火山)체로서 가까운 천해에서 폭발하여 산체가 형성되었으며, 산체는 화산재(灰), 화산사(火山砂), 화산력(火山礫) 및 화산탄(火山彈) 등의 화산쇄설성 퇴적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당산봉은 화산쇄설성 퇴적층으로 형성된 산체가 커지면서 육상화(陸上化)된 이후에, 다시 2차적인 분출활동에 의해 알오름(火口丘)이 형성된 오름이다. 말하자면, 당산봉은 두산봉이나 송악산과 같은 이중화산체인 것이다.

 수월봉은 해발 78m의 아주 낮은 오름으로, 별칭인 고산(高山)과는 사뭇 다른 이미지를 풍긴다. 수월봉 정상에는 팔각정이 자리잡고 있다. 팔각정이 자리잡은 지점은 동쪽으로는 넓은 ’고산들’을, 서쪽으로는 바닷가에 한가로이 떠있는 차귀도와 누운섬(와도)을 전망하는데 좋은 포인트가 되고 있다. 특히, 수월봉에서 전망할 수 있는 들판은 제주도 안에서는 가장 넓은 들판이란 사실도 함께 기억해 두는 것이 좋다. 제주도에서도 ’평야(平野)’라고 부를 만한 곳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곳이기 때문이다.

 팔각정에서 조금 떨어진 지점에는 2000년에 세운 수월봉 영산비(靈山碑)가 자리잡고 있다. 이 비(碑)의 내용으로 볼 때, 수월봉은 그 옛날 비가 내리지 않을 때면 동네사람들이 모여 기우제(祈雨祭)를 지냈던 장소이기도 하고, 또한 산에 영(靈)이 있다하여 영산(靈山)으로 매우 신성시하던 대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수월봉 남사면에는 고산기상대가 설치돼 있는데, 이 기상대는 서부지역의 기후를 관측하는 중대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당산봉은 북쪽으로 U자형의 산체를 보이며 두 개의 봉우리를 지니고 있다. 바닷가에서 가까운 서쪽 봉우리에는 조선시대 때 봉수대가 설치돼 있었는데, 이름하여 당산봉수다. 당산봉수는 차귀(遮歸鎭)진 소속이었으며 북동쪽으로는 만조봉수(느지리오름), 남동쪽으로는 모슬봉수(모슬봉)와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동쪽 봉우리에는 암석화된 퇴적층의 노두(路頭)가 드러나 있는데, 이를 ’거북바위’라 부르고 있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차귀도와 누운섬(와도), 넓은 들판 그리고 고산마을을 가운데 두고 산재하는 오름(농남봉, 돈두미오름, 산방산, 송악산, 단산) 등의 전경은 수월봉 정상에서 감상하는 것과는 또 다른 차원의 묘미를 불러일으킨다. 오름 정상부 아래로 전후좌우로 이어지며 펼쳐지는 파노라마 스타일의 경관은 분명히 색다른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정광중 탐사위원(제주교대 교수/인문지리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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