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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각봉
[삼각봉]‘耽羅 천년’의 論理
입력 : 2005. 10.13. 00:00:00


 ‘천년의 탐라문화 세계 속으로’

 며칠전 막을 내린 제44회 탐라문화제의 캐치프레이즈다. 탐라문화제가 열리던 날 필자는 무대 단상에 커다랗게 내걸린 그 캐치프레이즈를 보며 혼란에 빠졌다. ‘탐라문화가 천년이다’ 아무리 새겨보아도 도무지 새길 수가 없었다.

 궁예(弓裔) 휘하의 장군들이 왕건(王建)을 추대하여 고려를 세운 것이 918년, 지금부터 1088년 전의 일이다. 탐라국의 태자 고말로(高末老)가 고려에 입조한 것도 938년, 지금부터 따지면 1068년 전의 일이다.

 만약 탐라 천년이 맞는 것이라면 탐라국은 고려가 건국하고 나서 한참 뒤에 생겨났다는 것이고 탐라국의 태자 말로가 입조할 때는 아예 탐라국은 생겨나지도 않았다는 얘기가 된다. 이런 논리가 어디서 나올 수 있는 것인지 어처구니가 없었다.

 탐라국의 건국에 관해서는 기록문헌에 나타나는 것만 보아도 실로 여러 가지 설이 대두돼 있다. 그 오랜 것은 고조선시대까지 올라가는 것도 볼 수 있다. ‘당요갑자설(唐堯甲子說·BC2337)’, ‘당우지제설(唐虞之際說·BC2333)’ 등이다. 그러나 이 같은 설은 아직 학계의 공인을 받은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다음으로는 한시대(漢時代)설이 등장한다. ‘한고조병오설(漢高祖丙午說·BC195)’, ‘한선제오봉을축설(漢宣帝五鳳乙丑說·BC56)’, ‘한시대설(漢時代說·BC206~AD8)’, ‘한영평을축설(漢永平乙丑說·AD65)’등이다. 여기에 대해서도 딱 짚어서 이것이다 하는 정설이 도출된 것은 없다. 그러나 시기적으로는 크게 괴리되지 않는 주장들이라는 견해가 있다. 지금까지 발견된 제주시 용담동(龍潭洞)유적, 삼양동(三陽洞)유적, 외도동(外都洞)유적 등이 거의 기원1세기를 전후한 시대의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탐라의 건국에 관해서는 지금도 모든 학자가 동의하는 정설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삼국지위지(三國志魏志)’나 ‘후한서(後漢書)’를 비롯한 중국의 여러 사서에 등장하고 있는 기록이나 지금까지 출토된 유적유물을 놓고 볼 때 기원 1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이미 탐라국이 형성돼 있었다는 것을 추정해 볼 수 있다. 게다가 탐라문화는 탐라족이 집단활동을 시작하면서 이미 발상 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건국 이전 부터였다고 할 수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를 비롯하여 여러 사서에 나타난 것을 보면 탐라는 삼국시대인 5세기부터는 이미 백제(百濟)와 교류한 것을 볼 수 있고 신라(新羅)나 고구려(高句麗)와 교류했던 것도 알 수 있다. 수(隋), 당(唐)과도 교류가 있었으며 일본(日本)과는 더욱 빈번한 왕래가 이루어졌다. 모두 1천년 이전에 있었던 역사적 사건들이었다.

 한 민족이나 지역의 문화를 말할 때는 그 발상에서부터 흘러온 맥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을 앞뒤를 자르거나 중간을 자를 수도 없는 일이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있다면 거기엔 전제가 있어야하고 단서가 있어야 한다.

 탐라문화제 주최자들이 어떤 발상에서 나왔는지 알 수 없지만 이 참에 그릇된 것은 바로잡아야 한다고 믿는다. 탐라문화를 세계화시대에 세계로 파급 발전시켜야 한다는 주제는 매우 고무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먼저 자기인식부터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캐치프레이즈에 오르는 말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가장 잘 남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한 때의 구호가 아니라 많은 사람들을 오래도록 그릇 인식시키는 결과가 된다는 사실을 명기해야 할 것이다.

 지금 우리 주변에는 그릇 전파된 것이 너무나 많다고 하겠다. 마땅히 바로 잡아나가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릇된 것이 발견되면 즉시 바로잡는 태도를 보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홍순만/제주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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