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레토코는 일본에서 세번째로 자연유산으로 등재된 곳이다. 시레토코는 1990년 이전부터 환경보전과 지역의 가치를 발굴하고 선양하기 위해 민관 공동의 노력을 전개했다. /사진=시레토코 제공 ‘1인 1백㎡ 갖기’ 일본판 내셔널트러스트 운동 정부 벌채정책 주민들이 일심동체로 막아내 지자체 주도로 환경재단 설립 조사연구 앞장 취재진은 제주 세계자연유산의 등록 준비에 참고가 될만한 정보를 찾을 요량으로 유네스코 한국위원회의 주선으로 시레토코의 현지 기관을 방문하고 관계자들을 잇따라 만났다. 현지 기관 방문과 관계자 인터뷰는 유네스코 한국위원회를 통해 일자와 시간까지 사전에 조율, 성사됐다. 시레토코는 일본에서 세번째로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된 지역이지만 가장 최근에 세계유산에 등재된 곳이기 때문에 이 곳의 사례가 제주 유산 등재에 매우 유익할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시레토코의 각종 데이터와 관계자 인터뷰 결과, 시레토코는 세계자연유산 등재를 위해 이미 1993년부터 조사를 개시함으로써 철저한 준비의 일단을 보여준다. 10여년간의 철두철미한 준비끝에 이뤄낸 결과였다. 하지만 이는 겉으로 드러난 노력의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시레토코는 1990년 훨씬 이전부터 환경보존과 지역의 가치를 발굴하고 선양하기 위한 민·관의 일치된 노력이 전개됐다. 일본 최북단 홋카이도 섬의 북동쪽에 위치한 1964년 6월, 일본에서는 23번째로 국립공원으로 지정된다. 해안단애의 경관도 수려하지만 다양한 동·식물이 서식하는 생물다양성의 보고이다. 시레토코는 반도 양쪽에 두개의 마을을 거느리고 있는데, 오호츠크해 연안에 있는 마을이 샤리쵸(Shari Town, 斜里町)이며 반대편에 네무로 해협을 끼고 있는 곳이 라우스쵸(羅臼町)이다. 일본의 행정조직에서 정(町)은 우리나라 행정조직으로 치면 읍·면과 비슷한 조직이다. 시레토코의 자연보호와 유산 등재 노력은 샤리쵸에서 더욱 적극적이었다. 1972년 일본내에서 조차 당시만 해도 사례가 매우 드문‘샤리초자연보호조례’에 이어 이듬해 1974년에 시레토코 헌장이 잇따라 만들어 됐다. 샤리쵸는 오호츠크해의 칼바람과 한대기후 등 열악한 환경 때문에 낙후성을 면치 못해 주민들이 집단 이주했던 불모지였다. 샤리쵸는 1970년대와 1980년대 들어 두차례의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그 하나가 1970년대 불어닥친 부동산 투기 열풍. 자칫하다가는 지역의 터전이 거대자본에 내몰리게 될 상황이었다. 이 때 일본은 물론 세계가 주목한 내땅 갖기 운동이 이곳에서 대대적으로 전개된다. 이른바 일본판 ‘내셔널 트러스트운동’이다. 주민들은 1977년부터 이른바 ‘1인당 1백㎡ 갖기 운동’, ‘1인당 8천엔 기부 운동’을 대대적으로 펼쳐 투기바람을 몰아내고 마을을 지켜냈다. 샤리쵸의 환경보전과 무라카미 박사는 “이 운동이 세계유산 등재 당시 유네스코 실사단으로 매우 높은 평가를 받았다”고 말했다. ▲일본판 ‘내셔널 트러스트 운동’인 ‘1인당 1백㎡ 갖기 운동’이 시레토코 반도 샤리쵸에서 1977년부터 전개돼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 두가지 사례는 샤리쵸 뿐만 아니라 일본 국민들에게 자연보호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일깨우는 계기가 됐다. 특히 ‘1인당 1백㎡ 갖기 운동’에는 지난 1997년까지 4만9천여명이 참가했으며 기부액만도 5억2천만엔에 달했으며 기부자들의 이름을 기록한 기념관까지 세워졌다. 이 기부금으로 취득한 토지는 무려 4백59ha(1백37만평)에 이르렀다. 1988년에는 샤리쵸가 출자한 시레토코재단이 설립됐다. 이 재단 역시 개인·종신회원들이 기부한 성금이 재단 운영에 큰 힘이 되고 있다. 이 재단의 연구원 등 직원은 모두 28명. 이 재단은 시레토코의 자연해설, 조사연구, 교육연수, 국립공원 관리프로그램, 산림재생에 이르기까지 시레토코의 싱크탱크 역할을 하고 있다. <저작권자 © 한라일보 (http://www.ihalla.com) 무단전재 및 수집·재배포 금지 > |
이 기사는 한라일보 인터넷 홈페이지(http://www.ihalla.com)에서
프린트 되었습니다. 문의 메일 : webmaster@ihalla.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