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무형문화재 정동벌립 조교인 홍양숙씨가 정동벌립을 엮고 있다. 댕댕이덩굴을 재료로 이용해 촘촘하게 짜는 정동벌립은 제주섬 수공예품의 수준을 보여주는 모자다. 챙이 넓고 그윽한 빛깔로 우아함을 드러낸다. /사진=이승철기자 sclee@hallailbo.co.kr 중산간 댕댕이덩굴 줄기로 제작 수만번 손길 필요한 인내의 공예 귀덕리서 정동모자 등으로 응용 1999년 개봉된 영화 '이재수의 난'. 영화 초반부터 등장하는 벙거지가 있다. 통인(심부름꾼)이던 이재수가 흉흉한 민심을 전하러 끝없이 펼쳐진 오름을 내달릴 때 그의 목에 걸려 있었다. 민란의 장두로 거듭나기 전 이재수는 늘 갈색빛의 벙거지와 함께였다. 손에 들거나 목에 걸거나 머리에 썼다. 이재수만이 아니라 숱한 장정들이 그와 같은 벙거지를 쓰고 나온다. 영화에는 민란의 또다른 장두였던 강우백이 그것을 겯는 장면도 보인다. 영화속 벙거지는 정동벌립이다. 정동(정당)은 댕댕이덩굴을 뜻하는 제주말이고 벌립은 벙거지를 의미한다. 정동벌립은 지역에 따라 정당벌립, 정당벙것, 정당벙긋 등 다양하게 불렸다. '이재수의 난'의 배경이 된 1900년대초 무렵에 정동벌립이 제주섬 전역에 흩어져 애용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이 모자는 오랫동안 제주사람들과 함께했다. 정동벌립은 말 그대로 댕댕이덩굴로 짠 모자다. 정동은 제주섬에서 흔한 재료이긴 했지만 모자를 짜려면 제대로 된 게 필요했다. 한때 정동벌립을 현대적으로 응용한 정동모자 부업단지였던 한림읍 귀덕1리 사람들은 금악오름이나 서귀포시 대천동까지 가서 재료를 구해왔다고 말한다. 다른 식물에 감겨서 자라는 만큼 정동을 얻으려면 일일이 줄기를 걷어내는 수고로움이 든다. 어렵사리 장만한 정동은 줄기에 붙은 눈을 훑는 등 다듬어낸 후 햇볕에 바짝 말린다. 파란색이던 줄기는 섬의 햇살아래 차츰 갈색으로 변한다. 이것을 국수 사리처럼 둘둘 말았다가 꺼내 쓰는 데 모자를 짜기 직전에 얼마간 물에 담가둬야 줄기가 부러지지 않는다. 정동벌립은 챙이 넓다. 웨스턴 스타일이다. 파나마모자를 닮은 정동모자와는 분위기가 딴 판이다. 제주도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정동벌립 보유자인 홍달표씨(76·귀덕1리)가 최근 만든 작품을 봤더니 모자 양측의 길이가 50㎝에 가까웠다. 챙의 폭은 15㎝가 조금 넘었다. 햇빛을 가리기에 넉넉한 품을 갖춘 데다 무척 질기다. 홍달표씨는 "오래전부터 귀덕리에서 정동벌립을 짜왔다고 들었다. 정동벌립 하나를 짜려면 수만번의 손을 놀려야 한다. 정동모자에 비해서 두 배의 인내심이 필요하다. 정동벌립의 모양이 완성되어 갈수록 매번 시간이 참 오래간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라고 했다. 정동벌립을 겯는 일이 만만치 않음을 보여준다. 정동벌립 조교인 홍양숙씨(46·제주시 연동)는 "정동벌립은 마음으로 엮는 모자"라고 했다. 홍양숙씨가 촘촘하게 짜나간 정동벌립은 이 모자가 지닌 가치를 단박에 드러낸다. 망의 맨 윗부분인 '까마귀방석'에서 시작해 돌레떡(메밀이나 좁쌀가루로 쟁반만큼 크고 둥그렇게 만든 떡)만한 크기가 되면 정동 줄기의 가닥수를 바꿔가며 짠다. 여느 모자처럼 모양을 잡아주는 틀을 받혀 엮는 게 아니어서 망을 고르게 짜는 게 관건이다. 정동모자가 한창 관심을 끌 때 귀덕1리 성로동에서는 집집마다 겯는 일을 했다. 주문이 밀려들어 손이 모자랐던 적도 있었다.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정동벌립 전승자를 제외하면 두어명 정도가 간간이 겯는다. 귀덕1리 김원순씨(78)는 "정동모자를 짜면서 일곱오누이를 키웠다. 재작년까지도 9개나 짜서 팔았는데 요즘은 재료를 구하기 어려워서 그만뒀다"고 했다. 전승자들도 재료를 구하기 어렵다는 말을 한다. 홍달표씨는 20년전쯤에 걷어온 정동을 고이 보관하며 재료로 쓰고 있고, 홍양숙씨 역시 15년전에 구한 것을 사용하고 있다. 정동벌립을 쓰는 사람이 없는 데다 중산간의 지형이 변하면서 정동도 귀한 식물이 되어가고 있다. 정동벌립은 정동모자가 주목받은 이후 새삼 그 진가를 인정받은 문화유산이다. 정동모자를 찾는 이가 늘면서 그 원천이 된 정동벌립이 문화재로 지정됐다. 매끈하게 짜놓은 정동벌립은 손때가 묻을수록 색감이 그윽해진다. 햇살을 받은 정도에 따라 줄기가 조금씩 다른 빛깔을 띠는 데, 정동벌립이 완성되었을 때 그것은 또다른 멋스러움을 풍긴다. 지금 어디에 내놓아도 촌스럽지 않은 수공예품이다. 정동벌립을 만드는 사람이 끊이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생기는 이유다. 홍양숙씨는 "그동안 몇차례 정동벌립 제작을 배우겠다는 사람이 있었지만 일주일을 버티지 못하고 그만두는 사례가 많았다. 하지만 맥을 잇는 일을 멈출 수는 없다. 배우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열 일 제쳐두고 가르치겠다. 재료는 따로 재배해서 제작에 차질이 없도록 할 생각이다 "라고 했다. /진선희기자 jin@hallailbo.co.kr "대정 사람은 털벌립, 정의는 대패랭이" 다양한 재료의 모자 섬 곳곳서 애용 이들 모자는 모양이 크게 차이나지 않는다. 갓의 외형을 닮았다. 모자를 쓰는 사람과 그것이 만들어지는 곳은 달랐다. 제주목 사람들이 쓰던 정동벌립은 귀덕리가 주산지였다. 털벌립은 안덕면 감산에서, 대패랭이는 성산읍 난산에서 주로 만들어진 것으로 전해온다. 정동벌립은 문화재로 지정되면서 그 맥을 이어오고 있지만 털벌립과 대패랭이 제작은 제주에서 그 흐름이 끊긴거나 다름없다. 털벌립은 쇠털로 만든 벙거지다. 비바람에 견뎌내는 힘이 있고 단단해 방목한 우마를 돌보는 일에 안성맞춤이었다. '제주의 민속'(1994·제주도)에는 가난한 사람들은 털벌립을 갓 대신 썼고, 짐승의 털을 사용한 탓에 남자들만 쓴다고 적었다. 1901년 이재수의 난 때는 방탄용으로 썼다고 했다. 봄철에 소가 털갈이 할 때 소털을 모았다가 모자골이라는 틀에 맞춰 털을 붙이며 모양을 잡았다. 대패랭이는 남녀 공용으로 농민들이 주로 썼다. 정당벌립에 비해 가격이 저렴하고 실용적이어서 애용됐다. 역시'제주의 민속'을 보면, 대나무의 바깥 부분으로 만든 패랭이는 단단하고 탄력이 있는 데다 외형이 아름다워 상품으로 쳤다. 반면 속껍질로 만든 것은 여리고 썩기 쉽고 탄력이 없어 하품으로 취급했다. 모자는 늘 사람들과 함께했다. 정동벌립, 털벌립, 대패랭이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1930년대 제주섬에서는 이들 모자가 그리 흔치 않았던 모양이다. 일본인 이즈미 세이치가 그 당시의 관류(冠類)를 기록한 내용을 보면 우마 치는 사람들의 방한용 모자인 가죽감태, 대로 엮은 방추형의 갓인 방립, 방립보다 조금 큰 농립을 널리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나와있다. /진선희기자 jin@hallailbo.co.kr <저작권자 © 한라일보 (http://www.ihalla.com) 무단전재 및 수집·재배포 금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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