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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섬 문화유산 다시읽기
[제주섬문화유산 다시읽기](19)오메기술
섬의 고락을 다독였던 향기로운 음료
진선희 기자 jin@hallailbo.co.kr
입력 : 2007. 08.03. 00:00:00

▲제주도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성읍민속마을오메기술 보유자인 김을정씨와 강경순 전수 장학생이 뜨거운 오메기떡 반죽을 으깬 후 누룩가루를 넣고 휘휘 저은 뒤(사진 위) 반죽이 다 된 것을 술독에 붓고 있다(아래). /사진=이승철기자 sclee@hallailbo.co.kr

화산섬 토양 쌀 대신 잡곡 생산 많아
흐린 좁쌀로 떡 만들어 빚는 발효주
가운데 구멍난 찰진 오메기떡도 별미


"예전엔 집집마다 이 술을 만들어 먹었다. 나이 60이 넘은 사람들은 이 술을 다 기억할 것이다."

지난달 17일 표선면 제주민속촌박물관에서 만난 김을정(83) 성읍민속마을 오메기술 보유자. 성읍민속마을 오메기술은 1990년 제주도무형문화재 3호로 지정됐다.

이날 박물관에서는 오메기술 제작 시연과 체험 행사가 벌어졌다. 제주섬에 사는 사람들이면 누구나 오메기술을 만들 줄 아는 시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별미'가 되어버린 맛을 보기 위해 관람객들이 모여들었다.

오메기술은 차좁쌀을 이용해 만든다. 김을정 보유자는 물에 불린 후 표선의 한 정미소에서 곱게 빻은 연한 초록빛 가루를 들고 왔다. 좁쌀 가루는 떡을 만들기 위한 것이다. 다름아닌 오메기떡이다. 끓인 물을 가루에 부은 후 익반죽해 떡을 만든다.

오메기떡하면 가운데가 뻥 뚫린 도넛 모양의 떡으로 많이 알려졌는데, 꼭 그런 모양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가운데를 비워두는 것은 빨리 익히기 위해서다. 오메기란 말의 뜻은 분명치 않다. 대개 가운데를 오목하게 눌러준다는 말에서 오메기라는 말이 나온 것이 아니냐는 말을 한다.

김을정 보유자는 빠른 손놀림으로 송편처럼 동그랗게 모양을 빚은 후 가운데를 지그시 눌러줬다. 30개쯤 떡을 만든 후 솥에 넣었는 데 10분도 채 안돼 익었다. 떡이 삶아지는 동안 빗자루처럼 엮은 대나무를 넣었다. 떡이 바닥에 눌러붙는 걸 막기 위해서라고 했다.

떡을 건져낸 뒤 으깨는 작업이 이어졌다. 손을 바로 대지 못할 만큼 뜨거웠다. 나무 주걱을 이용해 충분히 다져낸 뒤 손으로 조물락거렸다. 여기에 누룩가루를 넣고 미지근한 물을 부어가며 휘휘 저었다. 그리곤 너무 되거나 묽지 않게 조절하면서 물을 부었다.

이 반죽은 곧장 술독으로 향했다. 여름철엔 술이 괴는 속도가 빠르다. 술독에 부은 지 4일후 쯤이면 오메기술을 맛볼 수 있다고 한다. 이날 행사장에선 이미 만들어놓은 오메기술을 무료로 제공했다. 약간 혼탁한 형태의 탁배기였다. 달짝지근한 맛이 감돌았다. 서울에서 왔다는 한 관광객은 "맛있네, 맛있네"하면서 금세 두어잔을 비웠다.

50년 넘게 술을 만들어왔다는 김 보유자는 "어릴적 어머니한테 술 만드는 법을 배웠다. 반찬이 없어도 오메기술 한 그릇을 마시면 배가 부른다고 하더라. 아침밥을 안먹어도 될 정도였다."고 말했다.

척박한 화산섬에서 쌀은 귀할 수 밖에 없었다. 논은 전체 농경지 면적의 0.5%에 불과했다. 쌀로 지은 밥은 신에게나 바치는'곤밥'이었다. 조와 보리 농사가 주를 이뤘다. 좁쌀을 이용한 오메기술이 널리 퍼졌던 이유다. 차좁쌀은 비단 오메기술만이 아니라 강술, 호박술, 엉겅퀴술, 새삼열매술, 생지황술, 댕유지술, 솔섶술 등 제주 전통민속주에 두루 쓰였다.

조선 중종때 쓰여진 김정의 제주풍토록에는 "벼가 매우 적어 지방 토호들은 육지에서 사들여다 먹고, 힘이 없는 자는 밭곡식을 먹는다. 청주는 매우 귀해 겨울이나 여름은 물론이고 소주를 쓴다" 고 기록됐다. 쌀로 만든 육지식 청주가 없고 밭잡곡으로 빚은 술을 마셨음을 알 수 있다. 증류주인 소주는 오메기술과 같은 발효주에서 출발한다. 오래전부터 오메기술의 역사가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즈막에 선보이는 오메기술은 탁배기가 많지만 술이 익은 후 윗부분에 맑게 뜬 청주를 고급한 것으로 여겼다. 청주는 잔치나 제사 등 특별한 날에 쓰였다.

오메기술은 제주도문화재로 지정돼 제조법 등이 전승되고 있지만 다른 무형문화재 종목과 다르지 않게 재료를 구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김 보유자는 전수장학생인 딸 강경순씨와 함께 아예 조 농사를 짓는다. 품질 좋은 차좁쌀을 얻어야 오메기술을 제대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1980년대 무렵부터 제주섬 식단의 주식이 쌀로 완전히 바뀌면서 차좁쌀을 구하는 게 만만치 않았다. 제주시 탑동에 들어섰던 초가장은 1980~90년대 오메기술을 전문적으로 제조해 팔았던 음식점인데, 이곳에서도 한림·세화 오일장에서 어렵사리 차좁쌀을 구해 술을 빚었다.

#'눈물 한 방울에 술 한 방울'빚어

제주섬 전통주 상품화는 언제쯤…


지금처럼 공장에서 만들어내는 술이 없었다. 가정에서 빚어 마셨다. 일제강점기에 이같은 문화가 사라졌다. 그 당시 도입된 주세 제도는 가정에서 술 빚는 것을 불법화했다. 해방후 숨통이 트이는가 했지만 60년대초에는 식량난이 극심해 술을 만들 때 곡류 사용을 금지하는 법이 생겨났다. 쉬쉬하며 술을 빚는 동안 전통주는 가야 할 길을 잃었다. 제주도의 사정도 다르지 않았다.

"마침내 1983년 1월 오메기술 면허를 받았다. 제주도에서 생산되는 흐린 좁쌀로 성의를 다해 오메기떡을 만들고 이 떡으로 술을 빚으니 이것이 곧 오메기술이다. 오메기술은 진귀한 '천하의 명주'라는 판정을 받고 이제 칠십여년의 쓰라린 고통을 안은 채 금일에 와서야 비로소 햇빛을 보게됐다."

1984년 7월 당시 도내 지방 일간지에 실린 광고의 내용중 일부다. 바로 초가장 개업인사였다.

10년간 제주시 탑동에 있던 초가장은 오메기술을 전문적으로 제조해 팔던 음식점. 안정립(작고) 대표가 오메기술을 대중화하겠다며 소매를 걷어붙였던 곳이다. 개업 인사를 보면 오메기술 제조 허가를 받는 데 얼마만한 어려움이 따랐는지 짐작할 수 있다.

안씨의 며느리로 당시 오메기술을 함께 만들었다는 송명순씨(52)는 "제주의 명주를 만들겠다며 동분서주했던 시아버지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생생하다"면서 "시아버지는 청주로 걸러진 오메기술에 대한 애착이 특히 대단했다. 손님들의 반응도 매우 좋았다"고 말했다.

오메기술에서 나오는 증류주인 고소리술 연구자 고익만씨(작고)의 노력도 빼놓을 수 없다. 고소리술의 진가를 알리겠다며 수십년간 힘을 쏟았다고 한다. 전통적 제조 방식으로 오메기술을 거쳐 고소리 한 솥에서 떨어지는 술을 모아 1병을 만들려면 한달 이상씩 걸린다. '눈물 한 방울에 술 한방울'이란 말은 그래서 나왔다.

일본 오키나와에는 '명주'로 치켜세우는 아와모리가 있다. 오키나와현은 아와모리를 또다른 문화로 널리 알린다. 아와모리의 탄생, 아와모리와 문화, 역사속의 아와모리, 아와모리가 완성되기까지, 아와모리를 맛있게 마시는 법을 담은 컬러 홍보책자가 따로 제작되어 있을 정도다. 오랜 세월 섬 사람들의 고락과 함께해온 아와모리를 통해 오키나와 문화와 역사를 읽을 수 있도록 했다. 오메기술, 고소리술 같은 제주 전통주에 아와모리만한 사연이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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