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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그는 누구인가]CEO 출신 첫 대통령…'청계천 복원' 신화
입력 : 2007. 12.20. 00:00:00
가난 딛고 최고경영자로 세계 누벼

서울 대중교통체계 개선 성공 평가



찢어지게 가난했던 목부(牧夫)의 아들 출신인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가 유년기와 청년기의 고난과 풍파를 딛고 마침내 청와대의 주인으로 국민의 선택을 받았다.

이로써 이 당선자는 CEO(최고경영자) 출신 정치인으로는 처음으로 대통령에 당선되는 기록을 세웠으며, 국회의원과 지방자치단체장(서울시장)을 거쳐 행정수반에 오르는 '그랜드 슬램'까지 달성했다.

국내 생존인물로는 유일하게 자신을 모델로 한 TV드라마가 두 편(야망의 세월, 영웅시대)이나 제작, 방영됐다는 점은 그가 얼마나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고, 코리안드림을 상징하는 '아이콘'이었는지 웅변하고 있다.

◇가난 그리고 어머니 = 이 당선자는 일제치하였던 1941년 일본 오사카(大阪)에서 태어났다. 목부였던 아버지 이충우(1981년 작고)씨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어머니 채태원(1964년 작고)씨 사이에서 태어난 4남 3녀(귀선, 상은, 상득, 귀애, 명박, 귀분, 상필) 가운데 다섯째였다.

해방 직후 귀국선에 올라 아버지는 동지상고 재단 이사장의 목장에서 일을 하고, 어머니는 과일행상에 나섰지만 가난은 지겹도록 그를 따라다녔다. 그런 와중에 집안의 희망은 포항에서 수재로 이름을 날렸던 둘째 아들(이상득 국회부의장)이었고, 자연히 이 당선자는 뒷전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서울대 상대에 입학한 둘째 형의 뒷바라지를 위해 고등학교 진학을 거의 포기하려던 즈음 한 은사를 만난 그는 진학의 꿈을 이뤄내기 위해 어머니와 담판을 벌여 "학비는 한푼도 달라고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허가를 받아냈다. 결국 동지상고(야간) 수석 합격과 3년 연속 수석을 이뤄내 무일푼으로 고교 졸업장을 따냈다.

이후 가족과 함께 서울로 이사한 이 당선자는 온갖 잡일을 하면서도 '고졸'보다는 '대학 중퇴'가 취직하는 데 더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 대입을 준비했고 청계천 헌책방에서 헐값에 구입한 참고서로 고려대 상대에 합격했다.

◇왕 회장과의 만남 = 이 당선자의 일생에서 어머니 만큼이나 큰 인연은 역시 '왕회장'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다. 가난으로 점철된 그의 성장기는 정주영이라는 기업인을 만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타고난 부지런함과 과감한 문제제기로 입사한 지 2년도 되지 않아 대리로 승진한 것을 시작으로 29세 이사에 이어 불과 35세에 현대건설의 사장이 됐고 이후 최장수 CEO(최고경영자)의 역사를 쓰게 된다.

▲제17대 대통령에 당선된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가 2005년 11월 서울을 방문한 영국의 앤드류왕자와 청계천에 나들이한 모습. 연합뉴스

현대그룹 재직시절 세계에서 3번째로 긴 말레이시아 페낭대교(연륙교)를 건설하고 이라크 화력발전소를 짓는 등 열사의 중동에서부터 동토의 시베리아까지 전 세계를 누비며 세계가 인정하는 최고경영자로 자리매김했다.

특히 세계경영을 펼치는 가운데서도 영국의 마거릿 대처 총리를 비롯해 싱가포르 리콴유 총리, 말레이시아 모하마드 마하티르 총리, 중국의 장쩌민 주석, 구 소련의 미하일 고르바초프 서기장 등과 교류를 통해 한국의 대표적 CEO로서 국제적인 감각을 폭넓게 익혀왔다.

현대그룹에 있으면서 그는 이화여대 메이퀸 출신의 부인 김윤옥씨와 결혼했고 세딸(주연, 승연, 수연씨)과 외아들(시형씨)도 얻었다.

20여년간 CEO로 지내면서 돈도 많이 벌어 지긋지긋한 가난에서도 벗어났다. 기준시가로만 3백80억원을 웃도는 이 당선자의 재산은 현대그룹 시절 중동에서 대형공사를 많이 따내면서 성과급으로 받은 것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따뜻한 불도저' 시장 = 민선 3기 시장으로 서울시청에 들어선 이 당선자는 4년간 청계천 복원, 대중교통체계 개편, 서울숲과 서울광장 조성 등 역대 어느 시장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대형사업을 의욕적으로 추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대표적인 사업은 두말할 것도 없이 청계천 복원. 취임 즉시 작업에 착수, 2003년 7월 청계고가도로를 완전 철거하고 이후 2년 3개월간 복원공사를 벌여 2005년 10월 5.84㎞의 청계천의 물길을 다시 시민의 품으로 넘겨줬다.

그는 그러나 서울시장 재임시절 복지예산을 가장 많이 늘렸다는 점을 청계천 복원 못지 않은 '자랑'으로 여긴다. ◇'여의도 입성' 15년…그리고 대권 = 이 당선자가 기업을 박차고 나가 정치를 처음 시작한 것은 1992년 당시 신한국당 대표였던 김영삼 전 대통령의 전국구 공천을 통해서다.

앞서 노태우 정권 말기였던 1991년 정주영 회장이 1천6백억원에 달하는 추징금을 맞은데 반발해 아예 당을 만들어 직접 정치를 하겠다고 나선 것을 뜯어말렸던 이 당선자는 '왕회장'과 길을 달리해 집권 여당으로 향했다.

▲제17대 대통령에 당선된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가 지난 1980년 현대건설 재직 당시 사우디아라비아의 알주바일 SNOS 준공식에 참석한 모습. 연합뉴스

그러나 '기업인 이명박'에게 정치판은 녹록지 않은 또 다른 세계였다. 1995년 서울시장 경선에 나섰으나 실패했고 이듬해 총선에서 '정치 1번지' 종로구에 출마해 이종찬씨를 누르고 당선됐지만 선거법 위반으로 재판을 받았고, 이 와중에 1998년에 다시 서울시장 경선에 도전, 최병렬씨와 경쟁했지만 선거법 재판이 나지 않아 의원직을 사퇴하고 미국으로 떠났다.

미국에서 1년여 와신상담하던 그가 1999년말 한국으로 돌아와 당시로선 생소하던 인터넷뱅킹 사업을 시작하면서 만난 사람이 최근 대선정국 막판까지 발목을 잡았던 이른바 'BBK 의혹'의 핵심인물 김경준씨다.

의욕적으로 새로운 사업을 하려던 차에 김씨가 '수익률 조작' 등으로 금융당국의 조사를 받게 되자 사업관계를 청산한 이 당선자는 2002년 삼수만에 서울시청에 입성, 전대미문의 치적으로 주가를 올린 뒤 대권 도전장을 냈다. 서울시장 선거공약으로 '청계천 복원'을 걸었던 그는 이번에는 '한반도 대운하 건설'과 '대한민국 7·4·7'을 제안했다.

다수의 반대를 꺾고 청계천 복원과 대중교통체계 개편 등을 성공시킴으로써 강력한 추진력을 대중에 각인시킨 그는 보수정당 소속이면서도 '실천하는 개혁가'라는 이미지 구축에 성공하면서 폭넓은 지지를 받으며 결국 대권을 거머쥐었다.

그러나 청와대에서 보낼 5년 임기에 그가 떠안아야 할 짐은 자신의 인생역정 만큼이나 무거워 보인다. 그러기에 1년여의 지독한 선거전을 치르고 힘겹게 대권을 잡은 그의 각오는 남다르다. 그는 "건국과 산업화, 민주화를 거쳐 선진화로 가는 길을 여는 것은 대한민국의 숙명"이라며 5년간 나라의 운명을 짊어지고 또다시 험난한 역사의 파도속으로 뛰어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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