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4.3 문학의 현장
[4·3문학의 현장](15)김관후의 '두 노인'
"스스로 살기좋은 통일국가를 꿈꿨을 뿐"
/진선희 기자 jin@hallailbo.co.kr
입력 : 2008. 05.16. 00:00:00

▲모래밭에 팔짝팔짝 뛰던 '멜떼'가 생각난다며 고향 서우리를 그리워했던 김후열 노인. 관광객들의 발길이 잦은 함덕 바닷가에도 한때 멸치떼가 하얗게 뒤덮인 적이 있었다. /사진=김명선기자 mskim@hallailbo.co.kr

비전향 장기수 부청하와 재일동포 김후열
한라산유격대로 활동했던 둘의 여정 쫓아
고향 서우리의 해후는 아직 때이른 꿈일까


한라산 유격대원으로 십여년동안 산에서 숨어살다 붙잡혔다. 전향서를 쓰지 않고 독방에서 수십년을 보냈다. 육신이 무너졌을때 비로소 풀려났다. 삼십년간의 감옥생활을 견딘 후였다. 비전향 장기수 부청하 노인이 그다.

무자년 동짓달 밤에 밀항선을 탔던 사내가 있다. 죽기아니면 살기로 일본으로 피신했다. 오사카 생활은 비참했다. 비닐공장, 부품을 만드는 공장을 전전하면서 겨우 목숨을 이어갔다. 어느덧 오십년. 김후열 노인은 이제 나이 여든이 됐다.

"나이가 들면서 모래밭에 팔짝팔짝 뛰던 멜떼가 생각나. 어릴 때 동무들과 뛰어놀던 마을 고샅이며, 선창에서 고기를 낚던 일이 그리워. 지금은 동무들 얼굴이 자꾸 희미해져 큰 일이야. 당장 고향마을로 달려가고 싶어."('두 노인')

시도 쓰고 소설도 쓰는 김관후씨(62)의 단편소설 '두 노인'은 4·3으로 인해 남아있는 자와 떠난 자의 여정을 뒤쫓고 있다. 제주시 조천읍 함덕리 서우봉에서 이름을 따왔다는 서우리 출신 부청하과 김후열이 그 주인공이다.

함덕리에 사는 김두연 4·3희생자유족회장, 한하용 조천읍유족회장과 함께 함덕해수욕장을 찾은 작가는 담배를 피워물었다. 숨비기꽃 가득하던 하얀 모래밭은 옛 풍경을 잃었다. 대형 숙박시설이며 놀이기구가 해수욕장 주변을 빙두르고 있고 굴삭기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작가는 1980년대 일본 오사카에서 재일동포들을 가까이 만날 기회가 있었다. 4·3소설집 '본풀이'(2006)에 실린 '두 노인'은 그때의 경험이 모티브가 됐다.

한때 조총련에 몸담았던 김후열 노인은 젊은 시절 한라산 유격대활동을 '가장 아름다운 청춘 스토리'로 기억한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의 한켠에 쓰라린 가족사가 있다. 서우리에 남겨진 아들은 신원조회에 걸려 사관학교 문턱을 못넘는다. 빨갱이 자식이란 손가락질을 견디지 못해 일찍 고향을 떴다. 일본에서 얻은 아들은 '북조선'으로 갔다.

"왜, 미군이 남의 나라에서 지랄을 하는지 억울한 생각이 들었어. 사람들이 총에 맞아 아우성인데, 몇사람이 총탄에 맞아 죽었는지 알 수도 없었어. 그후 섬은 풍비박산이 나고 말았지."('두 노인')

두 노인을 키운 것은 조천중학원이었다. 해방 이후 서우리 이웃마을에서 들어선 민족학교였다. 진보적인 사상가였던 중학원 선생들은 조선인 스스로 살기좋은 통일국가를 세우려는 꿈을 가르쳤다. 학생들은 그들을 믿고 따랐다. 목숨걸고 거리에 나섰고 삐라를 뿌렸다. 부청하가 먼저, 김후열이 그 뒤를 이어 산생활을 했다.

"산은 백설로 꽉 뒤덮이고, 뭇별만 총총한 하늘을 바라보는 젊은 혁명가를 상상해봐. 그는 스스로 시인이 될 수 밖에 없었어. 하늘을 천장삼아 광야에서 잠을 청했고, 홑옷을 입고 지내야 했어. 그것도 가시에 찢겨진 누더기였을 거야. 그는 분명 목소리 없는 예언자였어."('두 노인')

▲김두연 4·3유족회장, 한하용 조천읍 유족회장, 김관후 시인이 학살터였던 옛 모래밭을 거닐며 4·3에 얽힌 기억을 풀어내고 있다.

소설은 빨치산이 된 부청하를 그렇게 애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본다. '4·3항쟁'의 최전선에 섰던 노인은 '인민을 해방하고 조국을 통일하며 민족의 독립을 달성하기 위하여 봉기'했던 당시의 이념을 소중히 품고 있다.

소설의 말미, 마침내 김후열 노인은 그리던 서우리를 찾는다. 쓰러져가는 외딴 초가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는 부청하 노인을 본다. '산 계곡을 날쌘 노루처럼 뛰어넘었을 젊은 날'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는 얼굴이었다. 어색한 침묵뒤에 오십년만에 인사를 나누는 두 노인. 하지만 부청하 노인은 전향서를 쓰고 고향을 찾은 친구를 끝내 방안에 들이지 않는다.

"지금도 분단시대야. 분단 시대에는,우리 주장이 유효해. 우리는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부정했어. 우리는 양과자를 먹지 말자고 성토했어…."('두 노인')

함덕에서도 무자년때 여럿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들중 어떤 이는 성공한 사업가가 되어 제주땅을 다시 밟았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이들은 고향길이 멀기만 하다. 이 소설은 2006년 재일 '탐라연구회'가 펴내는 '제주도(濟州島)'에 일문으로 번역돼 실렸다. 어느 밤 도망치듯 제주땅을 떠났던 수많은 재일동포중에도 '두 노인'과 같은 사연을 간직한 사람이 있으리라.

[김관후 시인과 함덕리]멸치떼가 숨죽이며 밀항선을 기다리네

'제주섬 끝 부분의 상처를 더듬을 수 있는 함덕리에는/ 무자년 밀려난 파도가 다시 모여드는 함덕리에는/ 멸치떼가 숨죽이며 밀항선을 기다리는 함덕리에는/ 나의 처녀성을 아름답게 앗아간 함덕리에는//부동산업자가 배추밭에 하루 세 번씩 들르는 함덕리에는/ 이민회관 확성기에서 새마을노래가 들리는 함덕리에는'(시집 '함덕리'(2001)에 실린 '함덕리·3'중에서)

함덕리는 지금 개발이 한창이다. 여느 농촌과 달리 인구수가 점점 늘고있는 마을중 하나다. 늦봄이지만 함덕해수욕장엔 맨발로 바다에 뛰어드는 이들이 보인다.

김관후 시인은 유년시절 함덕리를 떠났다. 스물일곱이던 그의 부친은 4·3 때 숨졌지만 시신을 찾지 못했다. 작가는 최근 DNA검사를 위해 채혈했다. 정뜨르비행장 발굴 조사에서 혹시나 아비의 유해를 찾을 수 있을까 해서다.

그의 작품은 늘 4·3을 다뤄왔다. 비켜서려해도 결국은 4·3이 종착지였다. 제주시내 중학교로 진학하긴 했지만 함덕리에서 보고 들은 말은 그를 옭아맸다. 허긴, 그의 고향 함덕리는 우울한 가족사만 품고 있는 곳이 아니다. 군부대가 주둔해있던 탓에 드넓은 모래밭, 서우봉 부근에서 숱한 학살이 진행됐다.

1970년대 동측 모래밭 일대에 들어선 집터에서 하얀 뼈가 나왔다. 서둘러 다른 곳으로 치웠지만 왠일인지 집주인이 자주 바뀌었다. 지금 그 집은 허물어진 채 공터로 남아있다.

한하용(63) 조천읍4·3유족회장은 "당시에 그 일대를 발굴했더라면 4·3희생자 유해가 적지않게 나왔을 것"이라면서 "중학교 다닐때도 모래를 파다가 사람의 뼈, 여자 고무신 같은 걸 보고 놀랐던 기억이 있다"고 말했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아 이뤄지고 있습니다.
이 기사는 한라일보 인터넷 홈페이지(http://www.ihalla.com)에서 프린트 되었습니다.

문의 메일 : webmaster@ihall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