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연대와 2연대의 주둔지, 그리고 남북으로 이교동학살터와 특공대원 학살터가 있다. 그 중심에 '평화의터' 기념비가 최근에 세워졌다. 해방 직후인 1946년 모슬포에는 일본군이 사용하던 오무라(大村) 병사를 조선국방경비대 9연대가 접수한다. 1948년 8월 15일 이후에는 국군 제9연대와 국군제2연대가 교대로 주둔하였으며, 모슬포지서가 위치하고 있어서 제주 서부지역을 포함한 제주도 토벌대의 중심 역할을 수행했다. 이러한 이유로 다양한 사건이 발생했으며 그만큼 주민들의 희생도 클 수밖에 없었다. 그 중에서도 '자수하면 살려준다'는 말에 자수했다가 이교동 밭에서 학살 당한 사건과 민간인 특공대로 군경토벌작전에 참여했지만 오히려 모략에 걸려 총살되고만 특공대 학살사건은 지금도 모슬포 일대 주민들에게 악몽의 기억으로 남아있다. 4·3 당시 유혈적인 집단학살과 마을 소개 및 방화는 제주도에 계엄령이 내려진 11월과 12월 사이에 집중적으로 이뤄졌다. 입산 무장대에 대한 본격적인 진압작전은 3단계에 의해 진행되었는데, 첫번째는 1948년 11월~12월 두 달 사이에 국군제9연대(연대장 송요찬)에 의한 무차별적 진압으로 주민학살의 대부분이 이 기간에 이뤄졌다. 두번째는 1949년 1월~2월 사이에 국군제2연대(연대장 함병선)에 의해, 그리고 세번째는 1949년 3월부터 일본군 출신 유재홍 대령의 통합부대에 의해 전개되었다고 볼 수 있다. ▲모략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된 모슬포 민간 특공대원들이 총살당한 장소. 현재는 대정고등학교 교문쪽에 편입되어 있다. ◆토화와 주민학살 '관광학살'이나 '대살'은 첫번째 시기인 11월과 12월 사이에 나타난다. 관광학살은 주민들을 불러 모은 다음 혐의가 있는 몇 명의 마을 사람들을 골라내어 그들이 총살당하는 광경을 사람들이 지켜보도록 하는 것이다. 이때 경우에 따라서는 주민들에게 죽창으로 찔러 죽일 것을 강요하고 만약 이를 거부하면 총살하기도 했다. 그리고 대살은 가족 중에 한 사람이라도 산에 올라갔거나 특별한 혐의를 받을 경우에는 본인 대신 가족 중에 다른 사람을 잡아다 대신 죽이는 것을 말한다. 이와같이 이웃을 죽이도록 강요하고 이를 지켜보도록 총으로 위협하는 4·3 당시의 죽임의 기억은 6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모슬포 주민들의 뇌리 속에 뚜렷이 남아 있다. ◆이교동의 공개총살 9연대 군인들은 1948년 12월 13일 상모리 이교동 향사 앞밭에서 주민 48명을 공개총살한다. 군인들은 무장대 세포로 군부대에 체포된 이아무개의 진술에 따라 소위 무장대 협력자들에 대해 명단을 만들고 이들을 체포해 주민들 앞에서 총살하고 만것이다. 4·3 당시 다른 많은 학살사건들처럼 이 사건도 혹독한 고문 끝에 나온 이아무개의 자백 하나가 주민들을 무차별 총구 앞에 내세운 근거가 되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아무런 검증이나 재판 절차도 없었다. 또한 피학살자의 일부는 소위 도피자 가족들이었기 때문에 남아 있는 가족을 대신 학살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 사건을 주민들은 '대살 사건'이라 부르기도 한다. 특히 이 과정에서 대정중학원 학생들의 희생은 엄청났다. 상모리 허관보씨는 생전에 "모슬포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죽은 날이 1948년 12월 12일로, 도피자 가족들을 잡아다가 대살시킨 날이다. 한 10여 명 정도가 죽었는데 여든 살 난 강도일 씨의 할머니는 손자를 대신해서 죽었고, 모슬포 사람 정만규 씨는 당시 대정중학원 학생이었던 아들 정태석을 대신해 잡혀갔다. 그리고 정태홍씨 역시 당시 중학생이었던 동생 정태운 대신에, 그리고 강상모는 대정중학교 학생이었던 아들 대신 잡혀가 죽었다"고 증언한 바 있다. 당시 '이교동 향사 앞 밭' 희생자는 다음과 같다. ▷상모리 : 이고절(73·여), 허창영(53), 이신생(48·여), 허세현(47), 강상로(46), 문석채(43), 정만규(42), 김봉옥(40), 정태홍(40), 김영보(40대·여), 문재옥(35), 허경호(32), 허세남(31) ▷하모리 : 이성근(38), 김자득(30), 김형하(30), 오춘방(29), 이공정(여, 29), 지홍수(26), 문태운(25), 오봉인(24), 정여옥(24), 김동춘(23), 문태현(23), 오인매(22·여), 문경수(19), 김성근, 김성훈, 문달백, 문용수, 이원일, 윤평석의 아내, 윤성추의 아내, 양세균의 아내 등이다. 모슬포에서는 중산간마을에 소개령이 내려지던 1948년 11월에 민보단이 조직됐다. 또한 건강하고 산측에 협력하지 않은 소위 '사상이 건전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특공대가 조직됐다. 특공대원은 하모리에만 36명 정도 되었고, 이 대원들은 12명씩 3개 소대로 나뉘어졌다. 상모리에도 특공대는 조직됐으나 하모리 특공대가 대정면을 주도했다. 당시 대정면 특공대장은 가파도 출신인 이원하였고, 하모리 책임자는 송치수였다. 평상시 특공대는 민보단과 협조하여 마을 순찰을 도는 게 주업무였으나 산에서 습격이 들어오면 돌격조로 일선에 나가서 대항하기도 했다. 또한 특공대는 토벌대가 토벌을 나갈 때에는 총알받이로 앞장서서 길을 안내하기도 했다. 이럴 때는 지서나 군부대에서 몇 명 동원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특공대원들을 토벌대의 길잡이로 쓴 것이다. 특공대원은 군경과 달리 일반 민간인 복장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군·경·민간이 합동으로 토벌 나갈 때는 무장대와 구분하기 쉽도록 흰 띠가 두 개 둘러진 검은 모자를 쓰도록 했다. 그리고 이들에게는 자위를 위한 죽창이나 철창만 지급되었다. 특공대와 민보단의 사무실은 현재 장춘여관 자리였는데 지금도 옛집이 그대로 남아 있다. ◆원들의 억울한 죽음 특공대원 학살사건은 1949년 1월 10일 발생했다. 이 사건에 대해 고춘언 씨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특공대원들은 용감했어요. 이원하가 대정면 특공대장이었는데… 원하가 하루는 경찰이나 군대에서 총알받이로 나오라고 하면 죽창으로 대항이 안 되니까 군부대에 가서 '우리 특공대원들에게 무장을 주면 용감히 더 잘 싸우겠다'고 했어요. 부대에서는 '그러면 씩씩하고 건장한 사람으로 해서 명단을 보고하라'고 했어요. 그래서 아주 깨끗한 사람으로 11명 명단을 올려 보냈죠. 그러자 부대에서는 이 사람들을 다 데려오라고 하더니 가자마자 톡 가두면서 '이놈들 다 빨갱이'라고, '총을 주면 우리에게 대항할 것이라' 고 하면서 무조건 몇 차례 두들겨 팼어요. 그러다 이원하는 1월 6일에 먼저 죽고, 남은 열 사람은 12일에 다 죽었어요. 아무 이유없이. 이원하가 명단 제출한 것이 죽기 일주일 전쯤인 것 같아요. 가장 씩씩하고 용감한 사람들로 제출하니까 부대로 오라고 해서 이놈들 다 빨갱이라고 한 거예요. 그때 죽은 곳이 저 대정고등학교 앞에 있는 탄약고 옆이에요. 부대에서 2백m 정도 돼요. 당시 길 서녘쪽이었는데 그 길이 지금은 대정고등학교에 편입되어 버렸죠. 이원하씨도 거기서 죽었어요. 날짜만 다를 뿐이에요. 그 사람들 보고 자기네 죽을 구덩이를 파라고 했어요. 그 사람들은 뭣도 모르고 판 거죠. 시신은 거의 5월 나서 처리하라고 했어요. 가보니 갯벌이 되었어요. 손이 문작문작했죠. 봄이 나야 겨우 이장을 한 겁니다." 당시 희생자는 이원하(30대), 이동춘(25), 박형윤(29), 김석환(28), 안진택(26), 양우상(26), 김택선(25), 김희종(24), 강위창(21), 이용원(20), 김창숙(19)이다. ◆아득한 눈물 이 사건에 대해 유족들은 1960년 국회양민학살사건 진상조사특별위원회에 눈물로 억울함을 호소했으나 돌아온 것은 사회의 냉대 뿐이었다. 이교동 향사 앞밭 희생터는 상모리 일주도로 변 '송악산 입구' 라 쓰여진 이정표에서 동쪽 100m 지점의 밭이나 당시 흔적은 남아 있지 않다. 특공대원 희생터는 현재 대정고등학교 입구 '대정고등학교' 라는 표석이 세워진 곳이다. 당시는 밭이었으나 지금은 대정고등학교로 편입되어 흔적은 남아 있지 않다. 희생터 동쪽에 일제 탄약고터가 남아 있다.<오승국 4·3연구소 이사>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아 이뤄지고 있습니다. <저작권자 © 한라일보 (http://www.ihalla.com) 무단전재 및 수집·재배포 금지 > |
이 기사는 한라일보 인터넷 홈페이지(http://www.ihalla.com)에서
프린트 되었습니다. 문의 메일 : webmaster@ihalla.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