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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문학의 현장
[4·3문학의 현장](26)한림화의 '한라산의 노을'-1
바당 떠나 못살던 잠수 해방위해 산으로
진선희 기자 jin@hallailbo.co.kr
입력 : 2008. 08.15. 00:00:00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된 성산일출봉 아래 우뭇개에서 하루 두차례 펼쳐지고 있는 물질 시연. 무자년 난리때도 '바당'에 뛰어들어 미역물질 하던 해녀들은 이제 10분 남짓한 물질을 공연처럼 보여주며 늙어가고 있다. /사진=이승철기자 sclee@hallailbo.co.kr

4·3때도 물질했다는 할망 우뭇개 시연장에
일지 쓰듯 써나간 소설에 검질긴 민중의 힘
"무자년 독립운동은 일제 잠수항쟁과 연결"


그들이 물속에서 걸어나오며 웃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깊은 물에 들어 대여섯시간 자맥질을 반복하는 해녀들이 아닌가. 더욱이 카메라를 향해 포즈를 취하다니. 서귀포시 성산읍 성산일출봉 아래 우뭇개 포구에 가면 그런 풍경을 만난다. 지난해 8월부터 성산리어촌계 해녀중 80여명이 매일 두차례씩 '해녀 물질 공연'을 벌이고 있다.

가까운 바다에서 고된 물질 시늉을 내는 '공연'은 10여분 이어졌다. 우뭇개로 몰려든 일본, 중국 관광객들은 뭍에 오르는 해녀들을 붙들고 어울려 사진찍기에 바빴다. 시연에 참가한 5명의 해녀들은 구부정한 어깨에 고무옷을 입고 망사리를 멘 채 기꺼이 모델이 되어줬다.

올해 여든살인 성산리 김영례씨도 그중 한명이었다. 할머니는 "4·3때도 미역물질하러 이 바당에 뛰어들었다"고 했다. 당시 그의 나이 열여섯. 해안가를 낀 동네 여자라면 바다가 곧 밭이었다. 일곱살이 되면 여문 박을 부표 삼아 바다에 나가 살기 시작해, 몸이 저려오고 몸뚱이 버겁다 느껴지는 할망이 될 때까지 물질로 평생을 살아간다.

바다에서 끈끈한 벗이 되던 이 섬의 여인들이 있다. 김순덕, 홍희복, 양정례, 순임이 아지망…. 무자년을 건너는 그 이름들 위로 테왁이 두둥실 떠오른다.

"김순덱이 그년, 완전 독립된 나라, 해방된 민족 되젠 저 한라산일 들어가난 이 새마슬 바당서 벗들광 물질하던 일은 잊어불어신가. 안 잊어불고는 단 하룬들 저 산속이서 살 수가 없을 건디, 물괴긴 물 떠나민 당장 죽어불고 잠수년들은 바당 떠나선 못 살주게. 김순덱이 그년 모진 년이난 살암주."('한라산의 노을')

1947년 3월 1일 삼일절 기념행사장에서 시작해 6·25가 터진 뒤 실시된 예비검속 대상자들의 섯알오름 희생 장면까지 3권에 걸쳐 다룬 한림화씨(58)의 장편소설 '한라산의 노을'(1991). 작가의 말처럼, 4·3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 소설은 일찌감치 4·3의 몸통을 드러냈다. 소설의 대목대목 주요 사건, 인물이 때때로 이름을 바꿔달고 등장하는 데 4·3 일지를 보는 듯 하다.

이런 중에 작가가 애정어린 시선을 거두지 않는 것은 잠수(해녀)다. 그들은 자신의 선택에 당당하다. 무장대 총사령관이던 이덕구의 아내 희복과 그의 친구 김순덕이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있다. 희복은 "제주 역살 보라. 언제 백성이 들고 일어나서 이긴 적이 이시니?"라고 묻는다. 산으로 오른 김순덕은 반격한다. "제주 사람은 한 번도 진 적이 없다. 항상 얻고자 하는 건 그때마다 얻었져. 너 시아버지한테, 저 신축년 교란이 일던 이야길 더 들어보라."

이덕구도 장두 이재수처럼 목숨 내놓고 투쟁하는 거라고 믿는 김순덕. 그건 그만의 생각은 아니다.

"이 새마슬에서 독립운동하는 사람덜도 우리 잠수덜이 하는 일 몰람져. 김기자, 그리 알아. 김순덱이가 산에 올라간 건 어떵 보민 우리 잠수덜 대표격이주. 그 사람이 이제 덕구 선생을 보좌하고 있주이. 말하자면 우리 잠수덜이 너광 나광 모르게 비밀운동으로 참여한 건 바로 일제강점시대 잠수항쟁하고 줄이 쭉 이어젼 내려온 거여."('한라산의 노을')

해녀들의 노천 탈의장이자 물질 후 언 몸을 녹여주던 불턱은 말하자면 집회 장소였다. 이즈막의 불턱은 지붕에 송이돌을 얹어 반듯하게 지어진 '해녀의 집'이 대신하고 있지만 예전엔 돌담을 쌓거나 바닷바위를 이용해 잠수들만의 공간을 만들었다. '한라산의 노을'에는 불턱에서 오가는 잠수들의 대화가 자주 등장한다.

작가가 그려내는 잠수들의 세계는 참으로 이상적이다. 바다앞에선 늘 겸손하며 무슨 일을 결정할 때는 충분한 토론을 벌인다. 모진 물길과 싸우느라 악다구니만 남을 것 같지만 그들의 말씨엔 총명함이 넘친다. 소설속 이덕구와 고창룡의 관계처럼 상대의 뒤통수를 후려치는 배신이 그들에겐 없다. 고창룡은 무장대를 뛰쳐나와 결국 토벌대에게 이덕구의 은신처를 알려준 인물이다.

소설은 해녀를 통해 제주현대사의 한 축을 끌어간 힘은 결국 제주섬의 민중이었음을 설득력있게 풀어낸다. 작가가 인터뷰한 사람들은 그랬다. 4·3을 회고하는 동안 한결같이 "그때 사람들은 남북한이 갈리지 않게 독립운동을 한 것"이라고 했다. 60년전 그날, 제주섬 사람들에게 이 땅은 아직 독립된 국가가 아니었다. 해방된 나라를 꿈꾸던 그들이 선택한 길은 한라산이었다.

▲구좌읍 하도리 해녀박물관 입구에 있는 제주해녀항일운동기념탑. '한라산의 노을'에 등장하는 잠수들은 1930년대 해녀항쟁이 4·3때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말한다.



굿판에서 4·3을 만나다

10여년 현장 취재로 장편 탈고…증언 듣고 귀가한 날엔 피냄새


'한라산의 노을'을 쓴 한림화씨의 4·3 이야기는 굿판에서, 바다에서 시작됐다. 80년대부터 칠머리당영등굿, 우도 잠수굿 현장 등을 쫓아다녔다. 누구도 4·3을 입밖으로 꺼내지 않던 시절이었지만 굿판은 달랐다. 4·3을 말해달라고 하면 입을 다물던 여인들도 굿판에 가면 막힌 울음을 토해냈다.

그들은 산자와 망자가 만나는 '영게울림'을 통해 4·3의 역사를 쓰고 있었다. 굿판에 흩어지던 수많은 사설속에 무자년의 역사가 그대로 배어났다. 굿판에 모여든 사람들은 서로 울고 달랬다. 그것은 치유의 과정이기도 했다.

작가는 굿판에서 들은 이야기를 메모해뒀다가 확인과정을 거친 뒤 자료로 썼다. 굿판에서 낯을 익힌 사람들은 경계의 눈빛을 거두고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섬 구석구석 돌아보지 않은 마을이 없다고 했다. '도민'이덕구를 증언해주는 사람들을 여럿 만났고, 숱한 사연으로 산에 올랐던 사람들도 인터뷰했다. 다랑쉬굴에 불을 놓으라고 주도했던 메가네신사 같은 인물도 찾아냈다.

하지만 자료를 수집하면 할수록 미로를 헤매는 기분이었다. 4·3의 파고를 넘나든 이들의 증언은 때로 혼란을 부추겼다. 용강마을 아무개처럼 결정적 제보자를 만날 때도 있었지만 4·3당시 제주에 없었던 사람들이 마치 현장에 있던 것처럼 그럴 듯한 이야기를 꾸며대기도 했다. 4·3 증언을 듣기 위해 제사집을 돌거나 굿판을 들여다보고 귀가한 날이면 목에서 피냄새가 났다. 소설을 쓰기에 앞서 자료를 수집한 시간이 10년이었다. 그때쯤엔 단편적으로 흩어졌던 사건이며 인물이 퍼즐조각처럼 하나둘 제자리를 찾아갔다.

취재 과정은 험난했다. 누군가 만난 날에는 한밤중에 괴전화가 걸려왔다. 증언자들에게 해가 미칠까 싶어 초벌 노트를 상당수 태워버렸다고 했다. 이 대목을 말하는 그의 눈가에 설핏 물기가 번졌다. 목소리도 가늘게 떨려왔다. 공포감에 떨었던 그 시절의 기억에서 작가는 지금도 자유롭지 못하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아 이뤄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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