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4.3 문학의 현장
[4·3문학의 현장](31)김석범의 '까마귀의 죽음'-2
슬픔을 슬프다 말할 자유를 기억하라
입력 : 2008. 09.26. 00:00:00

▲재일 4·3문학은 곧 김석범 문학이라는 말이 있다. '까마귀의 죽음'에서 '화산도'까지 50년 넘게 4·3을 써온 작가는 4·3 당시의 비참했던 삶을 말할 때면 얼굴이 금세 어두워지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는 해방이후 한국땅에서 지지부진했던 친일파 청산이 끝내 제주섬의 참극을 낳았다고 말했다. /사진=김명선기자mskim@hallailbo.co.kr

1957년 '까마귀의 죽음'이 97년 완간'화산도' 낳아
섬의 까마귀도 인간시체 주체못하는 참극에 충격
"해방후 친일파 청산되지 않은 현실에서 4·3은 불가피"


▲김석범씨가 모처럼 환하게 웃었다. 작가는 4·3을 쓰지 않았다면 위태로운 줄 위에서 떨어졌을 거라고 말한 적이 있다.

'슬픔의 자유'를 아는가. 그것은 기쁨이다. 우리 '아방'이 학살당했다고 말도 못했던 시절이 있었다. 4·3 55주년쯤이 되어서야 하고 싶은 말을 했다. 대성통곡하며 아버지 어머니 이름을 부를 수 있었다. 그래서 기쁘다. 제주의 사건처럼 슬픔의 자유마저 빼앗은 일은 없었다. 제주도에서 도쿄까지 찾아든 기자들에게 작가는 맨 처음 '슬픔의 자유' 이야길 꺼냈다.

"눈은 바람에 흩날리면서도 광장 전체를 덮었다. 설경(雪景)속에 점점이 검은 색을 물들인 것은 두세 마리의 까마귀였다. 여기에는 야단스러운 슬픔도 분노의 울부짖음도 피에 굶주린 야수의 포효도 없었다. 깊이 쌓인 눈과도 비슷한, 그 사형광장을 지켜보는 군중의 침묵에 기준은 까닭모를 짜증스러움을 느꼈다."('까마귀의 죽음')

▲"너희들은 젊다, 그래서 말하는 거다." 제주도에서 일본 도쿄까지 찾아든 기자들에게 작가는 쉴새없이 묻고 답하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재일동포 작가 김석범씨의 소설집 '까마귀의 죽음'에 실린 4·3 연작 세 편엔 시체 더미가 종종 등장한다. 그것들은 트럭에 실어다가 구덩이에 파묻거나 돌에 매달아 바다에 던져버릴 시체였다. 그 때는 '섬의 까마귀도 인간의 시체를 주체하지 못하는'('관덕정') 세상이었다. 4·3의 불바다를 건너온 밀항자에게 들은 사연은 작가의 상상력이 보태지며 구체화된다. 섬의 삶은 비참했다. 제주 사람들의 눈에 일본동포가 잘사는 것처럼 보인 건 그만큼 그들의 생활이 밑바닥을 헤맸기 때문일 것이다.

'까마귀의 죽음'이 발표된 해가 1957년. 4·3을 일본에 처음 알린 작품이지만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다. 1971년 일본에서 이름난 출판사인 고단샤(講談社)에서 '까마귀의 죽음'을 표제작으로 단 소설집이 나왔을 때에야 차츰 일본 독자들의 눈에 들기 시작했다.

"정말 중요한 문제라면 내 고향이 아니어도 써야 한다. 4·3은 쓰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었다. 암흑속에 갇혀 빛을 보지 못하는 문제를 햇빛 아래로 끌어내는 게 글쓰는 이들의 임무 아닌가."

▲김석범씨가 조동현 도쿄 4·3을 생각하는 모임 대표(오른쪽)와 함께 했다. 두 사람은 4·3평화재단 이사장 선출을 둘러싼 잡음에 대해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며 "일본에서 4·3운동을 해온 사람들에게 힘이 빠지는소식"이라고 말했다.

60년전, 말 한마디 잘못했다고 어제는 '아방'이 죽고, 오늘은 '어멍'이 죽었다. 그리고 두려움 때문에 기억이 죽었다. 작가는 그 기억을 자꾸 불러냈다. 4백자 원고지 1백50장짜리의 '까마귀의 죽음'이란 짧은 소설이 1만 1천장 분량의 '화산도'로 이어진 것은 기억을 끄집어내려는 안간힘 때문이다. 당시 일본에 살던 작가는 4·3을 겪지 않았다. 4·3을 체험하지 않은 게 오히려 소설을 쓰게 만들었다. 만일 제주에 있었다면 그는 4·3 소설을 쓰지 못했을 거라 말한다.

'화산도'는 1976년부터 1997년 마지막 7권이 나올 때까지 무려 20년에 걸쳐 완성됐다. 한국어로 번역되어 나온 1부 집필을 끝낸 다음에 그는 언젠가 걸어온 길을 걷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화산도'가 '까마귀의 죽음'의 세계에 있구나란 걸 느꼈기 때문이다.

▲김석범씨가 조동현 도쿄 제주4·3을생각하는모임 대표(오른쪽)와 함께 우에노 밤거리를 걷고 있다. 제주와 4·3이라는 인연이 두 사람을 '망년지우'로 만들었다.

'까마귀의 죽음'에서 '화산도'에 이르는 대부분의 작품에서 4·3을 그려온 작가를 두고, 도쿄에서 만난 어느 재일동포 지식인은 "재일 4·3문학의 90%는 김석범 선생에게 있다"고 말했다. 김석범 문학은 곧 4·3문학이라는 말이었다.

작가는 젊은 날 한라산에 올랐던 추억을 펼쳐보이기도 했다. 해방되기 전 해에 함경도에서 온 친구들과 관음사 인근 코스로 한라산 정상에 오른 적이 있다. 백록담에서 그는 머리에 물을 적시며 이 나라의 독립을 기원했다고 말했다. 그 기억은 지금도 또렷하다면서.

해방은 독립을 가져다주지 않았다. 그것은 그에게 좌절이었다. 작가는 친일파가 청산되지 않은 현실에서 4·3은 불가피했다고 말한다. 전쟁이 끝나고 난 뒤 그 책임을 물었던 다른 나라와 달리 남한은 식민지배에 협력한 사람에 대해 어떠한 고발도, 재판도 하지 않았다. 친일파들이 다시 통치기구를 꿰차고 앉았다. 거기서부터 틀어졌다. 제주섬 사람들은 그래서 독립을 하려고 했고 당초 염원과 달리 수만명이 죽는 참극이 벌어졌다.

"일본은 자꾸 제 과거를 잊어버린다. 자기 반성을 할 줄 모른다. 그에 비해 한국에서는 과거를 강제로 잊게 만든다. '기억의 타살'이다."

▲인터뷰를 끝낸 김석범씨(오른쪽)가 조동현 대표와 함께 빗속을 걸어가고 있다.



장편 '화산도' 절반의 번역

20년전 비밀출판처럼 한국에 첫 선…내년말쯤 15권짜리 완역 출간 예정


일본어로 쓰여진 대하소설 '화산도(火山島)'가 한국에 처음 번역된 것은 1988년의 일이다. 실천문학사에서 모두 다섯권으로 나왔다. 곡절이 많았다. 김석범씨는 "당시의 신문광고를 보면 '화산도'라는 책 이름만 보인다. 작가의 이름은 어디에도 없었다"고 했다. 현기영의 중편 '순이삼촌'이 '화산도' 번역본이 나오기 10년전인

1978년에 발표되긴 했지만 재일동포 작가가 쓴 4·3 장편이 한국에 소개된 점은 의미가 컸다.

하지만 한국어판 '화산도'는 총 7권중 3권까지만 번역된 것이다. 거기다 원작은 번역본처럼 일지형식으로 쓰여지지 않았다. 제주풍속이 빠지는 등 내용도 더러 생략됐다. 작가는 현재 한국에서 '화산도' 완역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며 명년말쯤 15권짜리로 나올 예정이라고 말했다.

일본어로 쓰여진 '화산도'는 읽기 수월한 책이 아니다. 그것을 기꺼이 읽어내겠다는 독자들이 있다. 교토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화산도를 읽는 모임'(대표 하시모토 코오이치)이다. 제주출신 재일동포 1명을 제외하면 10여명에 이르는 모임 회원이 모두 일본인으로 구성됐다.

2005년 일본민주주의문학제가 교토에서 열린 게 모임이 꾸려진 계기였다. 김석범씨의 강연을 들은 청중들이 '화산도'의 무대인 제주도를 방문하고 싶은 뜻을 나타냈고 이듬해 5월 제주4·3연구소가 안내를 맡은 4·3 기행으로 이어졌다. 잃어버린 마을, 정방폭포, 알뜨르비행장 등을 둘러봤다.

제주에서 교토로 돌아오는 길, 참석자들은 직접 4·3의 현장을 누비고 이야기를 들은 만큼 이대로 모임을 끝낼수 없다고 생각했다. '화산도'를 다시 읽자는 이야기로 자연스레 의견이 모아졌다. 2006년 8월에 첫 모임을 가진 이래 한달에 한번씩 '화산도'를 읽고 이야기를 나눈다. 9월엔 6권의 마지막 장을 읽기로 했다. 내년 2월쯤이면 '화산도'읽기가 마무리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다. 김석범 전집 등 이들은 앞으로 김석범 문학을 계속 읽어나갈 참이다.

/도쿄=진선희기자 jin@hallailbo.co.kr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아 이뤄지고 있습니다.
이 기사는 한라일보 인터넷 홈페이지(http://www.ihalla.com)에서 프린트 되었습니다.

문의 메일 : webmaster@ihall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