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살터이자 잃어버린 마을인 호병밭은 광평마을과 이호2동 경계지역에 있다. 4·3 당시 집단학살의 흔적은 없다. 4·3당시 이호2구 주민들이 무자비하게 학살당한 임의밭의 현재 모습. 이호2동에서 1동으로 가는 샛길에 있다. 이호 2구 좌익마을로 몰리며 피해 커 '도피자 가족' 죄목 붙여 30여명 학살 1948년 10월 11일 제주도경비사령부(사령관 김상겸 대령)가 새로 설치되어 기존의 제9연대(연대장 송요찬 중령)에 부산의 제5연대 1개 대대, 대구의 제6연대 1개 대대가 증파 보강되었다. 여기에 다시 해군함정(해군소령 최용남 부대)과 제주경찰대(홍순봉 제주경찰청장)를 통합 지휘하는 권한까지 부여되면서 본격적인 초토화 작전이 시작된다. 게다가 11월 17일에는 대통령령 31호로 제주도에 한정된 계엄령이 선포되어, 이후 군경의 토벌은 점점 무차별 학살로 변해 갔다. 특히 9연대와 2연대의 교체시기였던 1948년 12월과 1949년 1월, 2월의 잔인한 토벌에 따른 도민들의 희생은 엄청났으며, 이 기간의 학살과 방화는 제주도민에게 커다란 상처를 남겼다. 서부지역 대표적 집단학살 사건 당시 제주읍 이호2구의 집단 학살 사건도 이러한 배경에서 일어났다. 이호리는 일주도로를 사이에 두고 1구, 2구로 나뉘어진 제주읍 서부지역의 큰 마을이었다. 지금은 일주도로가 더 남쪽으로 옮겨지고,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이호2동(속칭 '오도롱')이 큰 마을이 됐으나 4·3 당시에는 1구(속칭 '백개')의 인구가 더 많았다. 그러나 4·3으로 인한 인명희생은 인구가 적은 2구가 훨씬 많아 3백여명에 달한다. 이 숫자는 단일마을 희생으로서는 제주도에서 몇 째 안가는 대규모 인명희생이기도 하다. 희생자 중 남성은 1백84명, 여성은 89명이고, 연령별로 보면 20세 미만이 63명, 50세 이상이 51명으로 어린이나 노인들이 거의 희생자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이와 함께 소실된 가옥수도 3백36동이다. 이호2동에서는 4·3 당시 마을 인명피해 실태를 파악하려고, 1993년 초에 '제주시 이호2동 4·3희생 실태기록 추진위원회(위원장 김창주)'를 결성했다. 그 후 위원회는 3년여의 활동을 벌여 1995년 5월 '제주시 이호2동 4·3희생자 실태기록'을 발간한 바 있다. 위원회는 4·3 직전의 가구수(2백22가구)와 인구(1천58명) 조사에서 부터 8개 자연마을의 희생자를 마을별, 유형별, 성별, 연령별, 가해자별로 세분해 조사하고 피해 가옥수를 조사하는 등 주민들 스스로 4·3의 피해실태를 정확히 파악하여 보고해 마을 주민 스스로 4·3진상규명운동에 나선 모범적인 모습을 보여 주었다. 주민 스스로 진상규명에 나서 4·3당시 이호2구의 피해가 유독히 심한 이유로는 토벌대가 1948년 11월 중산간마을 소개 시기를 전후하여 이호2구 주변에서 도로 차단, 전주 절단, 왓샤 시위 등이 자주 일어나고 1948년 11월 27일 경찰의 지시에 따라 민보단 구성을 추진하던 전 구장 고두임이 무장대에 학살되자 이 마을을 주목하면서 부터였다. 또한 일제 식민지 당시 일본으로 건너갔던 이 마을출신 지식인들이 해방 후 마을로 돌아와 활발한 활동을 주도한 이유로 이호2구 마을은 좌익 마을로 몰리게 되면서 많은 피해를 입게 되었다. '호병밭 학살사건'과 '임의밭 학살사건'은 4·3 당시 이호2구에서 일어난 대표적인 집단학살 사건이다. 호병밭 사건은 무장대들이 통신 두절을 위해 48년 12월 5일경에 속칭 '백개' 일주도로가의 나무 전주를 톱으로 잘라 버리자 보복으로 주민들을 학살하고 마을을 소각시켜버린 사건이다. 호병밭 학살사건 산사람들이 전주를 잘라버린 이틀 뒤인 12월 7일 경찰들은 베어진 전주를 세우기 위해서 마을 주민들을 소집하였다. 이때 소집된 사람들 중에는 노형, 광평 등지에서 소개내려 온 주민들도 포함되었다. 이들은 대부분 장년층의 남자들로, 20대의 젊은 청년들은 이미 입산하거나 피신해 있어서 모인 남자 가운데는 젊은 사람이 거의 없었다. 경찰들은 특공대를 앞세워서 전봇대를 다시 세운 후 곧바로 호병밭에 주민들을 집결시켜 집단 학살하고 마을로 발길을 돌려 마을을 불태워 버린 것이다. 이 사건은 주민들을 '호병밭 사건' 또는 '전봇대 절단 사건'이라고 부른다. 이 사건으로 희생된 주민은 대략 30여명으로 추정된다. 당시 희생자 중에는 오도롱 주민 10여명 뿐만 아니라 노형, 광평 등에서 내려와 살던 주민들도 함께 피해를 당했다. 그 당시 오도롱마을에 살았던 한 주민은 이렇게 증언한다. "산사람들이 와서 전봇대를 잘라부니까 다 나와라해서 전봇대를 세웠어. 그 뒤 호병밭에 전부 모이게 해서는 눈감으라 한 뒤 특공대가 지목한 사람들을 죽였지. 남자만 30대 중반 이상들이지. 젊은 사람들은 아예 피해있었으니까. 경찰이 특공대에게 의심가는 사람들을 지목하라고 시켰는데 지목하지 않으면 자기가 죽으니까 어쩔 수 없이 지목을 했주." 또한 그는 말한다. "노형이 소개 된 다음이난 그때가 11월 7일이라. 다른데에서는 10월 말경에 광령이여 노형이여 소각된들 여기덜 왔주. 그때 11월 6일인가 5일쯤에 산에서 내령왕덜 백개 부근에 있는 전주를 베버렸주. 그땐 나무 전주들이라 톱으로 짤라 부니까 복구작업을 했거든. 그때 소개 온 사름들도 일들을 같이 나갔주. 그거 다 세우고 일 끝나난 이젠 총살시켜 불었어." 임의밭 학살 사건 경찰들은 이에 그치지 않고 얼마 뒤 오도롱마을 아래쪽에 있던 대동마을에서도 잔혹한 학살행위를 전개했다. 1949년 1월 13일 오전에 일어난 이른바 임의밭 학살사건은 이 마을 주민들의 가슴에 한을 맺히게 했으며, 지금까지 잊혀지지 않는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다. 임의밭 학살사건은 마을주민을 임의밭에 집결시켜 놓고 도피자 가족이라는 죄목을 붙여서 30여명의 주민을 집단학살한 사건이다. 이날 도두 경찰서 경찰과 특공대들은 이른 아침 대동마을로 와서 마을주민들을 임의밭에 모이게 하고는 마을 주민들이 다 모이자 특공대들은 도피자 가족을 지목하여 따로 앉히고 마을 사람들을 시켜서 밭에 구덩이를 파게 했다. 경찰들은 도피자 가족들을 앉은채로 총살시키고 특공대들은 도망가는 사람들을 철창으로 찔러 죽여 구덩이에 묻어 버렸다. 그 뒤 발길을 돌려 마을을 소각해 버렸다. 이때 살아있는 사람을 묻었을 뿐만 아니라 도망가는 아이들 까지도 철창으로 찔러 죽이는 잔혹한 행위가 벌어졌다. "그때 큰 구덩이를 두 개를 파서 살아있는 사람들도 많이 묻어 버렸주. 구덩이 둘레로 해서 사람을 세워서 창으로 찔렀어. 어떤 사람은 그거 무서워서 찌르기도 전에 쓰러져 버리는 사람도 있었지. 그러니깐 철창으로 했주. 그때는 총은 얼마 없었고, 겡헨 어린 아이들이 무서웡 도망가믄 그냥 창으로 찔렁 돌아매당 그냥 묻어 버렸주." 단지 도피자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어린 아이들을 철창으로 찔러 죽인 것은 인간적으로 용서받지 못할 짓이었다고 주민들은 말한다. 당시 희생자는 대략 30여명 가량이었다. 이는 이 마을로 소개 내려온 광평, 노형 사람들까지 포함된 숫자이다. 임의밭 사건 후 토벌대에 쫒긴 이 마을 사람들은 거의 산에 입산하게 된다. 이런 무자비한 마을 집단 학살 및 소개작전은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많은 도민들을 입산케 함으로써 4·3의 장기화와 수 많은 인명 피해를 초래케 했다. 현재 호병밭 마을터에는 두 가호만 들어서 있고, 나머지는 과수원이나 보리밭으로 변해버렸다. 원래 호병밭은 병풍이 마을을 둘러친 듯 경치가 좋은 곳이라는 마을 명칭의 유래에서 알 수 있듯이 전망이 좋은 곳이었다. 지금도 옛 마을 끝자락에는 올레와 군데군데 대나무 숲이 남아 있다. 당시 집단학살이 벌어졌던 임의밭 현장에는 개인 집이 들어서 있다. <4·3연구소 이사 osk4843@hanmail.net>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아 이뤄지고 있습니다. <저작권자 © 한라일보 (http://www.ihalla.com) 무단전재 및 수집·재배포 금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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