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업학교 운동장에서 귀순자 가운데 무장대 협력자를 가려내는 심문반(1949년 4월·사진 위). 제주농업학교 천막수용소. 1948년 가을부터 제주지역 기관장과 유지들도 대거 수용되었다(1948년 11월·사진 중앙). 제주농업학교에 설치된 미59군정중대 본부(1948년 5월·사진 아래). /사진출처=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 4·3 당시 제주농업학교는 도내 인재들이 몰려들어 수학에 정진했던 유일한 교육기관이었다. 그러나 4·3이 발발하면서 이곳에는 제9연대를 시작으로 11연대(48년 5월), 2연대(48년 12월), 독립제1부대(49년 7월) 등의 사령부가 줄줄이 자리잡았던 곳이다. 군 토벌대가 이곳에 주둔하면서 도내의 내로라하는 유지들과 지식인, 입산 자수자와 체포자 등 수많은 제주도민들이 잡혀와 고문과 취조를 당한 후 처형되거나 육지형무소로 끌려갔던 한과 눈물의 장소이기도 했다. 해방직후인 1945년 9월28일에는 일본군의 항복절차가 제주농업학교에서 진행됐고, 이어 학교 내에 미59군정 중대본부가 설치됐다. 1945년 9월10일, '제주도건국준비위원회'(위원장 오대진) 결성식이 이곳에서 열리며 해방직후 민중자치운동의 시작을 알리기도 했다. 제주농업학교는 제주도 고등교육의 산실로 일제시대에는 일제에 항거한 학생운동이 본산이었으며, 해방 이후에는 미국의 점령정책에 저항하는 학생운동이 거세없던 곳이다. 특히 '양과자반대투쟁' 등 미군정에 대항하는 운동을 주도했고, 1947년 3·1 시위에도 학생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이러한 상황은 4·3 당시 초토화 작전을 맞아 농업학교 학생이라는 이유만으로 희생되게 만들었으며, 실제 농업학교 학생과 교사들 상당수가 토벌대의 횡포를 피해 혹은 자진해서 입산하기도 했다. 그만큼 희생자도 많이 발생했다. 또 농업학교에는 9연대 본부가 주둔하면서 명실상부한 토벌의 중심부가 됐고, 여러 가지 사건을 겪었다. 또 천막수용소를 만들어 많은 도민들을 구금했고 고문취조도 그치지 않았다. 제주지역 유지들이 1948년 11월 이후 많이 끌려왔었고 일부는 즉결 처형되기도 했다. 1949년 봄 귀순공작에 따라 귀순한 주민들을 구금, 취조하던 곳 중의 하나이기도 했다. 박진경 연대장 암살 1948년 6월18일 새벽, 국방경비대 9연대에 이어 제주도 주둔의 임무를 밭았던 제11연대 박진경 연대장이 농업학교 숙소에서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박진경은 일제시대 일본군 소대장으로 제주도에 근무했던 적이 있었다. 따라서 미군정은제주도의 일본군 요새를 잘 아는 박대령으로 하여금 강력한 토벌을 전개하려고 평화적 해결을 원했던 김익렬 연대장의 후임으로 임명된 장교였다. 이 사건은 같은날 미군정 딘 소장이 직접 제주도에 내려와 조속히 범인을 검거하라고 지시하며 수사를 지휘하다 박대령의 유해를 직접 서울로 옮기는 등 미군정에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군 수사대는 1948년 7월12일 문상길 중위와 8명의 장병을 서울로 압송해 박대령 암살범으로 지목, 기소하게 된다. 8월8일 첫 재판 이후 8월14일 문상길 등 4명에게 사형이 선고되었다. 이 사건은 미군정하에서 일어난 한국군 최초의 하극상에 의한 고급장교의 암살 사건이기도 했으며, 사건의 범인으로 확인된 문상길 중위와 손선호 하사등의 총살처형은 최초의 군법재판을 거친 사형언도이기도 했다. 또한 이 사건은 미군정이 제주도 사태를 강경 진압하는 하나의 계기로 작용하기도 했다. 초토화 작전과 천막수용소 1948년 10월11일, 제주도경비사령부(사령관 송요찬 대령)가 새로 설치된 후 대통령령 31호로 제주도에 한정된 계엄령이 선포되어, 군경의 토벌은 점점 무차별 학살로 변해 갔다. 특히 9연대와 2연대의 교체시기였던 1948년 12월말 잔인한 토벌에 따른 도민들의 희생은 엄청났으며, 이 기간의 학살과 방화는 제주도민에게 커다란 상처를 남겼다. 이 시기에도 농업학교에 9연대가 주둔하면서 이곳은 토벌의 중심기지가 된다. 9연대는 토벌작전시 체포한 주민들을 이곳 천막수용소에 감금했다. 1948년 5월에서 9월까지 비교적 소강국면일 때에는 9연대의 작전중 잡아온 주민들을 일시 감금했다가 대부분 풀어줬지만 10월 이후 강경진압과 계엄령 국면에서는 이곳에 잡혀온 주민들이 즉결처형에 처해지는 경우도 많았다. 특히 1948년 11월, 12월에는 많은 제주지역 유지들이 끌려갔고 이들 중 이관석 제주중학교장, 갑자원 이상희 사장 등이 처형당했다. 이 때 끌려온 사람들은 법조계의 판·검사, 교육계, 언론계, 도청공무원, 재산관리처와 신한공사의 주요 간부, 독립운동가, 주요단체장 등 도내의 쟁쟁한 인물들이였다. 이들은 거의 희생되었다. 또 이 천막수용소에서는 2연대 주둔 시절인 1949년 3월 이후에 피난입산했던 주민들이 토벌대에 귀순하면서 그들을 수용, 조사를 벌이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일부 주민들은 혹독한 고문취조에 의한 자백을 바탕으로 군법회의에 회부돼 육지 형무소로 이송되어 6·25 발발 직후 집단 처형되기도 했다. 저승사자 탁성록 이러한 천인공노할 학살극은 당시 제9연대 정보참모 탁성록 중위의 지휘아래 조직적으로 저질러졌다. 제주 9연대 정보참모라면 당시 제주도 진압군의 핵심간부중에서도 핵심이었다. 이때 9연대의 군수참모로서 탁성록과 함께 근무했던 김정무 대위가 훗날 밝힌 증언을 보면 "탁성록은 마흔이 다 된 사람인데 정보참모의 자격도 없는 사람입니다. 군사영어학교 출신도 아니고 군악대에서 나팔 불던 놈인데 어떻게 특채됐는지 나보다도 먼저 대위를 달았어요. 이런저런 구실을 달아 여자들 성폭행을 많이 했어요."라고 밝힌 바 있다. 제주에서 탁성록과 관련한 증언은 그 악명이 높은 만큼 내용도 악독하다. 그 대부분의 증언은 '비위에 거슬리면 빨갱이라고 몰아 죽였다'거나 '여러 여성을 겁탈했다'는 내용이다. 그는 인간이라고 할 수 없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무소불위의 사형권을 가진 저승사자였으며 놀랍게도 아편중독자였다는 것이다. 탁성록은 이후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던 해 고향 진주로 돌아가 특무대장을 지내며 고향 인근의 주민들을 보도연맹원으로 몰아 집단학살을 자행하기도 했다. 탁성록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해방 이듬해인 1946년 콜럼비아 레코드사 전속의 대중가요 작곡가였으며 '탁성록 경음악단'을 이끌고 진주 등지에서 콩쿨대회가 열릴 때마다 출연활동을 했던 예술가였다. 이처럼 대중음악가였던 탁성록은 음악활동을 기반으로 하여 해군군악대 창설에 참여하면서 국군 장교로 특채되었던 것이다. 뜻밖에도 학살자 탁성록이 음악가였다는 사실이 우리를 놀라게 한다. 인간 이성이 마비된 냉혈한 학살자가 인간감성에 호소하는 음악을 했다는 것이 너무나 이율배반적이기 때문이다. 전농로의 전설 현재 제주농업학교는 제주고등학교로 개명되었으며 학교부지는 노형동으로 옮겨갔다. 4·3당시 학교건물이 있던 자리에는 '한국토지공사 제주지사'가 들어섰고, 운동장이 있었던 부지는 모두 주택가로 개발되어 당시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전에 농업학교가 있었던 곳'이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전농로의 벚나무 만이 그 비극의 역사를 묵묵히 전할 뿐이다. <4·3연구소 이사 osk4843@hanmail.net>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아 이뤄지고 있습니다. <저작권자 © 한라일보 (http://www.ihalla.com) 무단전재 및 수집·재배포 금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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