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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자연유산을 빛낸 사람들
[제주 세계유산을 빛낸 사람들](9)-②석주명 기념사업
제2부 석주명과 제주
토평 아열대연구소 기념사업 거점공간으로 활용
강시영 기자 sykang@hallailbo.co.kr
입력 : 2009. 05.13. 00:00:00

▲석주명 선생이 해방 직전 제주에 머물며 제주학 연구의 기틀을 다졌던 연구공간인 서귀포시 토평동 소재 제주대학교 아열대농업연구소. /사진=강경민기자 gmkang@hallailbo.co.kr

1943년부터 2년여 제주학 연구 매진
건축학·문화재위원회 가치 재평가
기념관·공원 등 기념사업 돌파구 주목


서귀포시 토평동 소재 제주대학교 아열대농업생명과학연구소는 세계적 '나비박사'이자 제주학 연구의 선구자로 추앙받고 있는 고(故) 석주명(石宙明·1908-1950) 선생이 제주에 거주하는 동안 연구의 거점 공간이었다.

석주명이 제주와 인연을 맺은 것은 그가 29세이던 193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석주명은 이 때 제주도산 나비류를 채집해 제주산 나비류 58종을 학계에 보고했다.

그가 34세이던 1942년에 경성제국대학 미생물학과 교실 소속인 개성의 생약연구소에 촉탁으로 들어갔다가 이듬해에 신설된 '생약연구소 제주도시험장'으로 자청해 제주에 부임한 것은 1943년 4월의 일이다. 이후 1945년 5월 제주를 떠나기 전까지 2년 1개월 동안 제주에 머물며 나비연구와 함께 제주학의 토대를 닦은 명저를 남겼다. 이 연구의 거점이 바로 제주대 아열대농업연구소인 것이다.

제주에서의 석주명 기념사업이 바로 제주대 아열대농업연구소를 중심으로 논의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다. 제주대 김태일 교수(건축학부)는 지난해 12월 제주도민속자연사박물관에서 열린 석주명선생 탄생 100주년 기념심포지엄에서 석주명의 활동 기반이었던 아열대농업연구소의 보존과 활용 필요성을 강조해 주목을 받았다.

"제주대학교 아열대 농업연구소는 석주명 선생이 활동했던 주요 공간이자 제주학의 연구기반을 다지게 했던 장소이기도 하다. 그러한 측면에서 아열대연구소의 건축물은 역사적·문화적 가치성을 갖는 것이며 보존의 필요성이 높은 것도 이와같은 이유 때문이다."

김 교수는 우선 아열대연구소의 건축양식을 주목했다. 그는 "아열대 농업연구소의 건축물은 일제시대에 건축된 구조물로 당시 건축됐던 일제시대의 건축양식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것으로 생각된다. 비록 수년전에 건축물 전체를 개보수해 약간의 변형이 있었으리라 생각되지만, 당시 공공건축물에서 요구되었던 권위와 위엄, 위계질서와 정돈된 느낌이 강조되었던 양식"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특히 흥미로운 점은 건축물 뒤쪽에 계획된 온실은 거의 원형에 가깝게 보존되어 있는 것으로 판단되며 그 역사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생각된다"고 밝혔다.

김 교수는 지난 4월 제주도문화재위원회 회의에도 참석해 아열대농업연구소의 건축물의 특징을 설명했다. 일제시대 건축양식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건축물로서 출입구를 중심으로 좌우대칭의 입면양식이며 정돈된 형태의 큰 창, 부분적 장식창, 온실이 당시 원형으로 보존되어 있는 점을 강조했다.

김 교수는 석주명의 활동장소와 연구활동 거점으로서 아열대농업연구소의 가치에 더욱 주목한다. 그는 아열대농업연구소를 보존해야 하며, 단순한 보존의 차원이 아니라 진정한 기념공간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12일에는 제주도문화재위원들도 아열대농업연구소 현장을 찾았다. 문화재 위원들은 건축물의 형태와 건축양식, 역사적 가치 등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다. 건축가인 김석윤 위원은 "건축 구조물의 문화재적 가치는 건축양식이나 형태 뿐만 아니라 장소, 역사성과 깊은 관련이 있다"며 문화재적 가치에 대해 높이 평가했다.

문화재 위원들은 아열대농업연구소를 석주명공원으로 확대하는 방안까지도 적극 논의할만 하다는 주장도 제기했다. 인근 도로를 '석주명로'로 명명하자는 의견도 있었다.

문화재위원들은 세계적 나비학자였던 석주명의 연구 거점인 서귀포시 일대를 세계적인 나비축제의 공간으로 극대화하지 못하고 있는 점에 대해서도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성공신화를 일군 함평 나비축제를 거론하면서 나온 탄식이다.

제주자치도의 행보도 주목된다. 제주도는 문화재위원회의 의견을 존중, 지난달 20일 제주대측에 아열대 농업연구소를 등록문화재로 추진하는데 따른 협조요청을 했다. 이와 관련 제주대는 관련 부서를 통해 의견을 수렴중에 있으며 조만간 최종 입장을 밝힐 방침이다. 제주대측은 현재 등록문화재 등록에 대해 신중한 입장인 것으로 전해져 최종 판단에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등록문화재 지정은 석주명 기념사업을 위한 단초가 되기 때문이다.

이 뿐이 아니다. 최근 제주향토문화예술중장기계획(2003~2011년)중 반드시 추진해야 할 사업이 가려졌는데 이 사업에 석주명 기념관 건립이 포함됐다.

[석주명의 회고록]제주 관한 것이면 무엇이든 수집

해방후 3년간 매년 신문자료 정리…1949년에도 추자도서 채집 기록


'나비채집 20년의 회고록'은 석주선이 1992년 그의 오빠인 석주명의 이름으로 낸 마지막 유고집이다. "6·25 동란으로 1·4후퇴시(…) 내 생명보다 더 귀중한 오빠의 원고가 진눈깨비에 젖는 것이 안타까워 코트를 벗어 배낭을 덮어 씌우고 뱃전에서 오들오들 떨던 기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던 누이동생 석주선이 오빠의 유고를 마지막으로 정리해 펴낸 단편들이 이 회고록에 담겨 있다. 회고록은 석주명이 생전 신문지상이나 학회지에 발표한 단편과 미발표된 단편들을 모아 합본으로 나왔다.

이 마지막 유고집이 관심을 끄는 것은 구석구석 제주에 대한 무한애정과 관심이 녹아있기 때문이다. "한라산이자 제주도이요, 제주도이자 한라산이다. 해상에 약 2000m나 되는 산이 높이 솟아 있으니 산으로 볼 때에는 한라산이라고 하고 섬으로 볼 때에는 제주도라고 하게 된다."(한라산의 나비)

그는 이 유고집에서 제주도의 나비류와 제주도의 여다현상, 제주도 방언과 비도어, 제주도 방언과 마래어, 탐라고사, 토산당 유래기, 신문기사로 본 해방후 제주도에 대한 단편들이 수록돼 있다. 여기에 살린 비도어(比島語)는 필리핀을 대표하는 언어이며, 마래어(馬來語)는 남양 전체의 민족이 널리 사용하는 공통어를 지칭하는 것으로, 제주도 방언과 이들 외국의 언어까지 비교 연구한 것이다.

석주명은 제주를 떠난 뒤 맞은 해방후에도 지속적으로 제주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나타낸다. '신문기사로 본 해방후 1년간의 제주도' 글머리에 "나는 제주도에 관심을 가진 사람의 하나이다. 무엇을 보든지 듣든지 제주도에 관한 것이면 수집정리하는 것이 나의 연구테마의 하나이다. 그러니 나에게는 제주도에 관한 자료는 정리가 된 것 안된 것이 많이 있다"고 적고 있다. 실제로 그는 해방후 3년간 1년 단위로 중앙의 유력 신문에 실린 제주도 관련 기사를 꼼꼼히 정리해 나간다. 행정, 문화·교육·종교, 식량·산업, 운수, 후생, 시찰, 한라산은 물론 심지어 광고에 실린 내용까지 추출하고 분류해 정리했다. 당시 제주도관련기사의 유형별 통계치였다.

석주명은 이 회고록의 '추자도의 나비'편에서는 1949년 8월, 추자도에 상륙해 채집했던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그가 불의의 피습으로 숨진 1950년 10월 6일보다 불과 1년여 전의 답사 일정으로, 한국산악회의 제6회 학술조사대원으로 왔을 때의 일이다. 그는 이 때 상·하추자도와 횡간도에서 채집활동을 벌였으며 "여태까지 제주도(濟州島)에서만 알려졌든 '제주꼬마팔랑'이 횡간도에서 잡힌 일"을 기록으로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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