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멜은 한국땅에 표류했던 인물중 가장 널리 알려진 외국인이다. 조선 억류 기간동안의 임금을 청구하기 위해 쓰여진 '하멜 보고서'는 '하멜 표류기' 등으로 출판돼 유럽에 조선을 소개했다. 국내에서는 1917년 재미교포 잡지인 '태평양'에 연재되는 것을 최남선이 발견해 그대로 '청춘'이란 잡지에 전재하면서 하멜이 알려졌다. 1939년 역사학자 이병도가 '하멜 표류기'를 출간한 것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하멜 표류기록이 10여종 번역되어 나왔다. 조선땅에 표류한 서양인은 하멜 일행이 처음은 아니다. 기록에 남아있지 않은 서양인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중 '하멜 보고서'에서 주목할 이름이 있다. 하멜보다 앞서 조선에 표착한 네덜란드인 얀 얀스 벨테브레다. 벨테브레는 제주섬에 하멜 일행이 다다랐을때 통역관으로 등장한다. 중국, 일본, 유구국에 표류했던 사람과 말이 통하지 않으니 다른 나라 사람일 거라 생각하고 정부에 이를 알리는데, 그때 벨테브레를 제주로 내려보낸다. 하멜 일행과 벨테브레가 마주한 날은 표류한 지 두어달이 흐른 10월29일. "우리가 서로 손짓 발짓으로 많은 이야기를 할 때까지 조용히 있던 그 사람은, 서툰 네덜란드 말로 우리가 어느 나라 사람이며 어디에서 왔는지 물었다. 우리는 그에게 암스테르담에서 온 네덜란드 사람이라고 대답하였다." '하멜 보고서'는 하멜 일행이 벨테브레와 만나던 장면을 무미건조하게 기록해놓았지만 '지영록'은 다르다. 벨테브레가 하멜일행 중 3명을 보고 "나와 형제 같은 사람입니다"라고 말한뒤 서로 이야기를 하면서 슬피 눈물을 흘렸다고 썼다. 그가 조선에 표착한 해는 1627년. 조선인 박연으로 귀화해 살던 중 하멜 일행의 통역을 맡았다. 조선 여성과 결혼해 두 자녀가 있었다. 동료 두 명과 함께 병자호란에 참전했던 박연은 무기제조에 관여했고 조선군에서 중요한 직책을 담당했다. 박연은 일본 나가사키로 보내달라는 하멜 일행에게 옷과 먹거리가 남아돌고 신변이 안전한 훈련도감에서 함께 일하자고 제안한다. 박연은 "교역하는 일은 전날과는 달라, 다른 나라 상선은 하륙을 허락하지 않아 배위에서 서로 장사하는데 그 나라 사람일지라도 남의 나라에 왕래하는 자는 반드시 죽인다. 하물며 너희들이 타국인임에야. 나와 같이 서울로 올라가서 훈련도감의 포수로 입속하느니만 못하다"고 했다. <저작권자 © 한라일보 (http://www.ihalla.com) 무단전재 및 수집·재배포 금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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