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장대는 물론 토벌대에 앞장선 이도 없는데다 중산간마을도 아닌 하원마을은 4·3 당시 양쪽에 의한 대학살이 벌어졌다. 화마를 피한 초가 2동과 노거수, 방어용 성담으로 쌓았던 마을 안길의 돌담이 역사를 알려준다. /사진=강희만기자 hmkang@hallailbo.co.kr 평온한 문촌 지식인들 무고하게 피해 입어 위령비 세워 억울한 희생주민들 넋기려 서귀포시 중문동 하원마을. 한 주민이 수령 300년은 넘을 거라고 소개한 검북낭(풍개나무)이 마을 안쪽 골목에 숨어 있다. 60여년 전 목격한 기억을 되살리기 싫어서일까, 혼자만 살아남은 게 미안해서일까 나무는 그저 침묵만 지키고 서있다. 산에 올라 무장대 활동을 하는 사람이 있던 것도 아니요, 군·경에 몸담고 토벌대에 앞장선 사람이 있던 마을도 아니다. 일주도로변에 자리잡고 있는지라 중산간마을처럼 소개령이 내려지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 마을은 토벌대와 무장대 양쪽에 의해 죽고 죽이는 복수극의 희생양이 됐다. 제주전역에 4·3 광풍이 휩쓸 때 하원마을은 그래도 다른 마을에 비해 평온한 편이었다. 예로부터 서당이 많아 문촌으로 불려온 마을에 비극의 그림자가 숨어든 건 1948년 9월 중순. 도순리 출신 우익청년단원이 하원리에서 살해되자 경찰은 하원마을 청년 3명을 끌고갔으며 이들의 행방은 지금까지도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후 토벌대는 군경의 피해가 발생할 때마다 마을을 주목한다. 11월 초 피해를 증폭시키는 사건이 발생했다. 무장대가 중문지서를 습격하자 이를 지원하기 위해 파견된 토벌대가 하원리 인근 속칭 '어둔마루'에서 매복 공격을 받게 된 것. 토벌대는 하원리 주민들을 향사에 집결시킨 뒤 한 청년을 공개 총살하면서 첫 희생자가 나타난다. 12월초까지만 모두 네차례에 걸쳐 중문 '자운당'과 지서 인근 농경지에서 20여명의 청장년이 토벌대에 의해 무고하게 학살됐다. 4·3진상보고서에 의하면 6·25전쟁 직전 한라산 잔존 무장대는 60여명에 불과할 정도여서 사실상 거의 소탕된 것으로 추정됐다. 하지만 전쟁이 발발하면서 하원마을은 거꾸로 무장대의 공격을 받게 된다. 1950년 7월말 무장대가 하원마을을 습격해 민가 99동을 불태운 것은 전쟁 발발 후 무장대의 첫 공격이었다. 이듬해 7월까지 무장대 습격이 6차례 이어지면서 사망과 실종자가 11명에 이르렀다. 4·3 당시 토벌대로 인한 하원마을 피해자는 50명, 무장대에 의한 사망·실종자는 11명으로 모두 61명이 희생되고, 가옥 104동이 소실된 것으로 나타났다. ▲하원마을 위령비 /사진=표성준기자 마을향토지에 무장대가 다이너마이트를 폭파해 마을을 습격한 사건이 기록돼 있다. 그러나 한 주민은 다른 주장을 한다. "바른 소리 잘하는 어른이 법화사 인근 용천수를 마을 식수로 끌어오기 위해 대나무를 준비하고 쌓아뒀었어요. 그런데 경찰이 여기에 불을 지르게 한 뒤 폭탄 터지는 것처럼 '따닥' 소리가 나자 무장대와 가까워 폭탄을 숨겨놓은 것이라고 누명을 씌워 잡아갔어요." ▲하원마을 노거수 ▲하원마을 초가 2010년 4월 하원마을은 4·3사건 이전처럼 평온을 되찾았다. 도로 곳곳에 파놓았던 참호는 매워지고, 토벌대와 무장대가 마을을 습격하면서 드나든 골목길은 넓혀졌다. 주민들이 경찰에 폭행을 당하며 죽창 훈련을 받던 부지에는 복지회관이, 첫 총살극이 벌어진 향사 자리에는 번듯한 주택이 들어섰다. 그러나 100여동이 소실되는 화마 속에서도 용케 살아남아 추레하게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초가 2동이 과거를 말해준다. 마을 곳곳의 돌담도 남녀노소할 것 없이 몽둥이 매질을 감수하며 등짐을 져다 쌓은 성담이었다. 살육을 지켜본 늙은 나무는 그 자체로 마을의 역사이면서 세월의 잔상이다. 마을전체가 토벌대와 무장대에 의해 자행된 대학살의 현장 하원마을이다. 고응칠 전 하원마을 4·3유족회장 "보복의 악순환이 시대의 비극 불러" "당시 마을에 서당이 많아 배운 사람들도 많았어요. 좀 바른 소리를 한다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희생됐던 것이지요. 제주4·3사건은 우리 하원마을에도 치유하기 힘든 아픈 역사입니다." 하원마을의 피해를 그는 보복의 악순환이 불러온 시대 비극으로 규정한다. 희생자들의 억울함을 풀어 명예를 회복하고, 반세기 넘게 숨죽여야 했던 유족들의 한을 풀기 위해 사업을 추진한 이유다. "오매불망 기다린 세월이 너무 길었습니다. 억울한 부모형제와 친지, 이웃삼촌의 억울한 죽음 앞에 이제야 빗돌을 세워 목놓아 울고자 합니다." 위령비를 세워놓고 그는 그렇게 울었다. 이제 끝난 듯 하지만 아직 해결해야 할 일이 남았다. "아무리 화해와 상생이라고 하지만 직접 피해를 주고 받은 사람끼리는 그게 어려워요." 하원마을 유족들은 2일 오후 마을 위령비공원에서 위령제를 지냈다. 이날 위령제에는 지금은 80이 넘은 재일교포 자매가 찾아 아버지를 그리워했다. 하지만 여전히 참석하지 않는 그리고 참석할 수 없는 이가 남아 있는 위령제다. <저작권자 © 한라일보 (http://www.ihalla.com) 무단전재 및 수집·재배포 금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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