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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선희기자의 문화현장
[진선희기자의 문화현장]담담하고 끔찍하게 그린 그 날
진선희 기자 jin@hallailbo.co.kr
입력 : 2010. 04.20. 00:00:00
노근리 사건 다룬 '작은 연못'
잘 만든 4·3영화에 대한 갈증
60여년전 봄날의 일상 복원을

햇빛에 바랜 초록숲이 눈을 시리게 했다. 60년전 7월의 어느 날이었다. 땀에 젖은 아이들은 텀벙텀벙 물속으로 뛰어들었고, 나비가 그런 아이들 뒤를 좇았다. 순박한 시골 풍경이 그렇게 오래도록 이어지는가 싶었지만 한순간 그런 기대를 앗아갔다. 피난길에 오른 마을 주민들의 머리 위로 폭탄이 떨어지고 총알이 빗발쳤다.

영문도 모르는 사람들은 혼비백산했다. "아, 미군이 왜 쏴. 빨갱이겄지." 남쪽으로, 남쪽으로 피난길을 재촉하던 미군들이 보내준다던 '도라꾸'를 기다리는 주민중 한 명은 그렇게 말한다.

한국전쟁 당시 '노근리 사건'을 다룬 영화 '작은 연못'제주 시사가 얼마전 제주시내 한 극장에서 열렸다. 시민사회단체 관계자 등을 초청한 행사였는데 극장이 그득찼다. 제작 기간 8년이 걸린 영화는 142명의 배우와 229명의 스태프가 노개런티로 참여했고 여러 시민들도 그 뜻에 힘을 보탰다.

'노근리 사건'은 한국전쟁 초기인 1950년 7월 25일부터 29일까지 4박 5일간 충북 영동군 노근리 일대에서 참전 미군에 의해 수백명의 무고한 민간인이 학살당한 사건이다. 오랫동안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이 사건은 1999년 AP통신 보도 직후에 진상 조사가 이루어졌고 사건발생 50년이 흐른 2001년 1월 미국 클린턴 대통령이 유감표명 성명서를 발표했다.

제주4·3 관련 단체에서는 그동안 노근리에 주목해왔다. 4·3과 미국의 연관성을 탐색해온 이들은 '노근리'와 '제주 4·3'이 수많은 이들을 이유없이 쏘고, 이유없이 죽게 만든 사건으로 동아시아 양민학살의 역사속에서 둘의 유사점을 들여다본다.

영화 '작은 연못'엔 전쟁통인데도 나무 그늘에 앉아 바둑을 두는 노인들, 노래자랑에 나갈 준비를 하느라 들떠있는 아이들, 아이업고 집 나선 아내를 말리느라 안절부절인 노름꾼 남편이 있다. '담담'하면서도 '끔찍'하게 노근리의 '진실'을 담아냈다고 해야 할까. 관객들은 이들 순박한 사람들에게 가해진 총격이 오래도록 잊혀진 역사였다는 점에서 마음이 무거워질 듯 하다.

근래에 제주 4·3을 다룬 영화가 꾸준히 제작되고 있다. '작은 연못'을 관람하고 발길을 돌린 이들은 '잘 만든' 4·3영화가 나오길 기대하는 분위기였다. 도민에게 드리운 상처가 그만큼 크다는 방증이겠지만 '경직된 사고'를 벗는 게 우선인 것 같다. 4·3하면 떠오르는 몇몇 이미지들이 선악 구도를 이루며 대립하는 이야기론 그 날의 구체적 참상을 전하기 어려울 지 모른다. 60여년전의 봄날 어딘가엔 고요함도 있었을 터, 하나둘 모여 숲을 이루는 나무 같은 그 날의 일상에도 눈길을 돌려보자.



'진선희 기자의 문화현장'은 이번주로 마칩니다. 지난 2년간 애독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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