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임새를 잃은 염전이지만 거기에 담긴 가치에 주목한다면 보존방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지미봉 자락 아래 종달리 염전터. 한때 논으로 변했던 염전에 초록빛 갈대가 출렁이고 있다. /사진=이승철기자 종달리 소금밭 메워 논 만들었지만 무성한 갈대숲으로 애월 배무숭이 염전 형태 특이성 놓고 보존 필요 주장도 동일리의 소곰밧(마을 바닷가에 소금을 만들었던 동네). 화순리 서쪽 해안가의 소금막(소금을 구웠던 지경). 오조리의 소금막(과거 소금을 제조했던 장소). 조천읍 신흥리의 소금밧(북쪽 해안의 갯벌로 소금을 구운데서 연유). 서귀포시 효돈동의 소금막(아랫 동네 남쪽의 해변으로 소금을 굽는 막). 오성찬의 '제주토속지명사전'(1992)에 나오는 염전 관련 지명들이다. 염전은 하나둘 소멸의 길을 걸었지만 아스라한 지명들은 짠내음 나는 어느 날을 떠올리게 만든다. 종달염전터를 기억하는 빗돌과 염전을 논으로 바꾼 공을 기리는 도지사 공덕비. 제주시 구좌읍 종달리도 소금을 빼놓고 말할 수 없는 마을이었다. 종달리 사람들을 일러 흔히 '소금바치'라 불렀다고 한다. 제주어 '-바치'는 '그 일에 종사하는 사람'이란 뜻을 더하는 접미사다. '종달리의 큰애기덜은 소금 장시 제격이여'(김영돈의 '제주도 민요연구 상'·1981)란 노랫말도 전해졌다. 그만큼 종달에서 소금이 대량 생산되었다는 말이겠다. 1910년을 전후한 시기의 종달리 소금 생산량은 제주에서 으뜸이었다. 조선총독부농상공부에서 편찬한 '한국수산지 제3집'에 자세한 수치가 나와있다. 염전평수는 4만7460여㎡로 도내에서 가장 규모가 컸다. 1년치 생산량도 단연 앞섰다. 53톤이 넘었다. 두번째로 연간 생산량이 높았던 시흥리보다 갑절 많았다. 70대 이상의 마을 노인들은 대개 소금에 얽힌 일화가 하나쯤 있다. 조규철 종달리노인회장도 "어린 시절 간수(소금물)를 나르느라 손이 부르텄던 적이 많았다"고 했다. 종달리 소금밭도 다른 지역처럼 활기를 잃어갔다. '육지'의 소금이 다량 수입되었던 탓이다. 광복후 동부수리조합이 창설됐고 1957년부터 종달리 소금밭에 700m 가량의 방조제를 쌓아 간척지를 조성한다. 정부가 쌀 생산을 장려하던 시기였다. 1968년 11월 북제주군은 24ha의 농토를 만든다. 90년대까지 논 농사가 이루어졌지만 쌀이 남아돌면서 자연스레 폐작의 길을 걷는다. 애월읍 배무숭이 소금밭. 벼가 익었던 소금밭은 초록 갈대밭으로 변했다. 2006년 9월 북제주문화원에서 설치한 '종달리 소금밭의 유래' 빗돌이 옛 흔적을 말해줄 뿐이다. 그 빗돌 옆엔 60년대 소금밭을 황금 들녘으로 만들어준 당국에 대한 고마움을 담아 1970년 2월 세워진 제주도지사와 북제주군수 공덕비가 보인다. 끝내 소금밭도 사라졌고, 논도 사라졌다. 제주지역 염전은 일부를 제외하곤 오래된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동안 몇몇 논문과 단행본을 통해 제주도 염전에 대한 고찰이 이루어졌지만 보존이나 활용에 대한 움직임은 적었다. 최근 제주문화원은 현장조사 등을 통해 애월 '배무숭이 소금밭'을 꼼꼼히 기록한 자료를 낸 적이 있다. 제주문화원은 이 자료에서 "애월리 배무숭이 소금밭이 이제까지 알려진 제주의 다른 소금밭과 달리 인위적으로 염전을 조성했다"고 주장했다. 애월에서는 사리때만 바닷물이 미치는 곳에 돌담을 쌓아 여러 군데 소금밭을 구획짓고 바닷물이 들어오는 수로, 바닷물 저장소인 물통을 조성했다. 염전 바닥은 잔돌로 평평하게 다져놓고 그 위에 모래를 깔아 소금을 만들었다고 했다. 배무숭이 소금밭 주변엔 양식장이 들어섰지만 염전의 흔적을 지울 순 없었다. 모래가 품은 소금기를 빼내는 데 쓰였을 넓적한 돌 따위가 눈에 들어온다. 제주문화원은 "배무숭이 소금밭은 반드시 보존되어야 할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쓰임새를 잃은 염전이지만 거기에 담긴 가치에 주목한다면 새겨야 할 말로 들린다. 종달리지 염전 증언 조규철씨 "소금밭을 떠올리면 고생한 사연만 생생" "종달리 사람의 절반은 소금을 생산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소금을 만드는 일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소금밭을 떠올리면 고생했던 기억밖에 없네요." 조규철 회장은 갈대밭으로 변한 염전터를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 종달리 소금은 품질이 좋았다고 한다. '지미의 맥'에는 종달리에서 생산된 소금이 진상품으로 쓰였고, 바다 건너 다른 지역으로 팔려나갔다는 대목이 나온다. "소금 만드는 과정 하나하나 엄청난 노력이 필요합니다. 소금물을 운반하는 일부터 판매하는 일까지 혼자 힘으로 할 수 없었죠. 가로 2m, 세로 4m 크기의 가마솥에 소금물을 넣어 불을 때는 작업만 해도 꼬박 48시간을 매달려야 했으니까요." 조 회장은 모래밭에 바닷물을 골고루 뿌리는 일을 시작으로 가마솥 수북이 소금알갱이가 쌓이기까지의 제염 과정을 조목조목 설명했다. 그에겐 어느 것 하나 수월한 일이 없었다. 마을에서는 1년 3주기로 소금 생산과 판매가 이루어졌다. 주로 3~4월에 생산하고 5~6월에 판매, 7~8월에 생산하고 9~10월에 판매, 11~12월에 생산하고 1~2월에 판매하는 방식이었다. 교통편이 여의치 않은 때라 소금을 팔려면 10~15일 일정이 소요됐다. 최근 도내 몇몇 마을에서 염전을 복원하고 있다는 말에 조 회장은 "종달리에서는 어려울 것"이라고 답했다. 소금 생산에 필요한 기반이 닦였다해도 누가 예전처럼 수일동안 불을 때면서 소금을 만들겠느냐는 거였다. 종달리 소금밭은 이제 '올레꾼'들의 입에서나 오르내리지 않을까 싶다. '제주올레'가 맨 처음 내놓은 코스에 소금밭 터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저작권자 © 한라일보 (http://www.ihalla.com) 무단전재 및 수집·재배포 금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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