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은 물이 흐르고 산이 아름답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처럼 제주시 애월읍 물메마을은 늘 풍경화같은 경관을 간직해 찾은이를 편안하게 해준다. /사진=강희만기자 hmkang@hallailbo.co.kr 주변경관과 어우러진 곰솔 자태 시선 이끌어 물메오름·저수지엔 제주의 아픈 역사 오롯이 제주시 애월읍 산록도로변 '노꼬메오름'에서 발원한 내가 굽이굽이 감돌다 절경에 취해 멈춰선 곳. 예로부터 맑은 물이 흐르고 산이 아름답다고 해서 물메마을로 불린 수산(水山)리다. 맑은 물과 아름다운 풍광을 따라가서인지 사람들 인심 또한 넉넉한 마을은 늘 고요하고 아늑하기만 하다. 도처엔 400년된 곰솔과 제주섬에서는 보기 드물게 큰 저수지, 샘과 봉수대로 유명했던 수산봉, 포제단과 본향당 등 다양한 볼거리들까지 널려 발길을 끈다. ▶곰솔=덩치도 크거니와 수형도 빼어나 제주도 천연기념물 제441호로 지정된 수산리 곰솔은 높이 10m에 둘레가 4m에 달한다. 지상에서 2m 높이에 원줄기가 잘린 흔적이 남아 있는데 여기에서 4개의 큰 가지가 나와 사방으로 뻗었다. 수산봉 남쪽 저수지가에 자리잡고 있는 이 나무의 남쪽 가지 끝부부은 나무 밑둥보다 2m나 낮게 드리워져 있는데 그 자태가 주변 경치와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특히나 저수지가 생긴 후로는 남쪽으로 뻗은 가지들이 산들바람이 불 때마다 물과 살짝 접촉하는 장면을 연출해 괜스레 보는 이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400여년 전 수산리 설촌 당시 진주 강씨 선조가 뜰 안에 심었다고 전해지는데 그 강씨 후손인 강병국(82) 할아버지는 "1601년에 난리가 나서 강씨 자손들이 화를 당해 뿔뿔이 흩어져 집은 없어졌지만 나무는 살아남아 후손들이 계속해서 관리해왔다"고 증언했다. 곰솔 뒷쪽 수산봉 남쪽 자락에 세워진 진주강씨 수산파 제주도 입도 3대 묘비가 옛 일을 알려준다. 지금은 노쇠했지만 주민들은 여전히 마을 수호목으로 여기는데 나무에 눈이 쌓이면 그 모습이 백곰과 같다고 해서 곰솔이라 불렀다고도 하고, 곰이 저수지의 물을 마시는 모습을 연상시킨다고 해서 곰솔이라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덩치도 크거니와 수형도 빼어나 제주도 천연기념물 제441호로 지정된 수산리 곰솔. 학교 교육을 받아보지 못했다는 강병국 할아버지가 당시 일을 상세히 기록해 놓고 있다. '밭을 갈아치우고 논농사를 지어 쌀을 생산하여야 기아현상을 타파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상급 관청의 지시로 마을주민들은 과거 500년을 조상대대로 살아온 삶의 터전을 등져야만 했다. 그러나 강력한 쌀농업 진흥책을 추진했던 이승만 정권이 4·19의거로 붕괴되자 저수지는 제대로 사용되보지도 못한 채 방치되고 말았다. 수산리 하동마을은 냇가에 위치한 죄 때문에 수몰을 당해 뿔뿔이 흩어져야만 하는 근시안적 농업정책의 희생양이 된 것이다.' 1980년대 말 위락시설과 낚시터로 개발해 유원지로 활용되기도 했던 이 저수지는 아이러니하게도 마을 명소가 됐다. ▶물메오름=해발 122m에 불과하지만 주민들의 삶의 터전이었던 오름이다. 정상 부근에는 오랜 가뭄에도 샘물이 솟아나 식수로 사용하기도 했는데 제주목사가 직접 이곳을 찾아 기우제를 봉행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지금은 자취를 감췄지만 비가 온 뒤에는 늘 땅 속에서 물이 솟아난다. 정상 부근에 있던 봉수대 역시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데 '이심전심'인지 전투경찰대 초소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그러나 주민들은 문화재로 보존해야 할 봉수대 자리가 없어진 것을 애석해하고 있다. 지명만큼이나 자연을 생각하는 물메마을 주민들은 그래서 제주시에 사업신청을 했다. 조상들이 느낀 삶 그대로를 자신들도따르겠다는 것이다. <저작권자 © 한라일보 (http://www.ihalla.com) 무단전재 및 수집·재배포 금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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