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한근 부회장은 "이 사회에 내가 보탬이 될 수 있는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라며 활짝 웃었다. /사진=김치훈기자 제주서 고교졸업 후 본격 서울생활 과외·학원운영·무역업 등으로 성공 "고향 사람들 위해 무엇이든 하고파" "세상 사람들과 함께 나눌 수 있는 무언가가 있을 때 그 삶이 행복입니다.” 고교를 졸업하자마자 무작정 상경, 과외로 시작해 학원 운영과 무역업체까지 경영하다 은퇴해 재외제주도민 총연합회 부회장을 맡고 있는 오한근(64)씨. 오 부회장이 처음 서울 땅을 밟은 때는 1963년 중학교 졸업과 함께다. 형편이 어려운 가정의 7남매 중 여섯째인 그는 중학교 시절 공부도 축구도 잘했지만 "형들도 형편이 어려워 중학교 밖에 못나왔다"는 부모의 말에 스스로 돈을 벌어 공부를 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와 생선야채가게의 점원으로 일을 시작했다. 이때 제주에서는 오 부회장의 대정중학교 은사였던 양익종 선생이 제주농고로 자리를 옮겨 공부와 축구를 잘했던 그를 축구장학생으로 입학시키기 위해 부모를 설득하고 있었다. 양 선생의 끈질긴 설득에 그의 부모와 부산 등지에서 생활하고 있던 형들의 허락으로 제주농고에 입학했다. 그는 당시 원예 담당이던 허인옥 선생(현 제주대 교수)의 추천으로 학교내 유리온실과 학교 도서관을 관리하면서 숙식문제를 해결한 끝에 고등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오 부회장은 고교졸업 후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그는 사촌집에 머물며 친척 아이 1명을 포함 3명의 아이를 맡아 과외를 시작했다. 그 당시 대학 등록금은 5만6000원. 과외로 번 돈과 가르치던 아이들 부모의 도움으로 국민대학교에 입학했다. 과외는 대학생 때도 이어졌고, 아이들이 늘어나면서 학원규모로 커졌다. 그는 과외가 없는 날이면 아이들에게 태권도를 무료로 가르쳤고 가정방문을 통해 공부뿐만 아니라 아이들의 생활습관과 태도, 부모님에 대한 효행까지 점검했다. 오 부회장은 사람들을 대할 때 아이고 어른이고 누구든 진실된 마음으로 대하는 것을 어머니에게서 배웠다고 했다. "어머니는 방 하나와 부엌 하나인 허름한 독채를 항상 거지들을 위해 비워두셨다. 이들에게마저 어머니는 정성을 다해 음식을 차려 대접했다"며 그 당시를 회고했다. 오 부회장은 과외로 크게 돈을 벌어 25살에 집을 마련했다. 집은 과외학원으로도 사용했는데, 다락방까지 합하면 8개의 방이 있었다. 이 방들은 수업이 없는 밤 시간에는 주로 고향에서 올라온 사람들에게 제공됐다. 1년 이상 그의 집에 머문 사람만 15명. 취업을 위해 서울에 올라와 그의 집에 머물며 주소지를 옮긴 사람도 38명에 이른다. 여동생과 함께 살던 오 부회장은 고향 사람들을 위해 해마다 150포기의 김치를 담가야 했고 한달에 쌀 한가마 하고도 절반을 사용했다. 오 부회장은 33살 때 집 3채를 마련했다가 카톨릭 신자로서 집을 3채씩이나 갖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 2채를 처분해 슈퍼마켓을 운영하다 무역업까지 했다. 오 부회장은 요즘도 고향 사람들의 대소사는 잊지 않고 꼭 챙긴다. 오 부회장의 베푸는 삶은 자식들에게 살아있는 교육이 됐다. 아들은 대기업에 입사했다가 변호사가 되기 위해 로스쿨에서 공부를 하고 있다. 딸은 고려대 법대를 졸업하고 변호사를 하고 있다. 아들도 1주일에 하루는 장애인시설 등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딸도 한달에 3~4차례 다문화가정을 찾아 무료법률 상담을 해주고 있다. 가난이라는 유산을 물려받고 훌륭한 어머니 밑에서 자랄 수 있었던 것을 하늘의 가장 큰 은혜라고 이야기하는 오 부회장. 그는 "이 사회에 내가 보탬이 될 수 있는 어떤 일이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라고 말했다. <저작권자 © 한라일보 (http://www.ihalla.com) 무단전재 및 수집·재배포 금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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