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은 영천초의 탄생 배경이 된 법호촌의 유래를 말해주는 기념비. 현재 서귀포온성학교와 이웃한 시온교회에 놓여있다. /사진=진선희기자 제주난민귀농정착개척단 입주 법호촌 배경으로 학교 탄생 진통끝 토평초로 통폐합 결정… 서귀포온성학교로 새출발 서귀포시 상효동에 있는 시온교회. 설립 이후 세 차례 이사해 서귀포온성학교 인근 지금의 자리에 둥지를 틀었다. 1956년 창립한 시온교회는 법호촌의 역사와 함께하는 곳이다. 교회 건물 뒷편에 쓸쓸히 놓여있는 2개의 비석은 그 점을 증거한다. ▲옛 영천초에 들어선 서귀포온성학교. 2개의 비석중 하나는 사단법인 제주난민귀농정착개척단 창립 기념 송덕비다. 단기 4289년(1956년)4월 설치됐다. 비문에는 제주도지사 길성운, 남제주군수 김선옥, 서귀면장 부윤경의 이름이 새겨졌다. 제주난민귀농정착개척단은 빗돌에 "우방국가 혜택으로 귀한 원조"를 받았고 "물심양면 다바쳐서 새 광명을 비쳐"줬다는 비문을 새겼다. 또다른 하나는 '단장 백원정 장로 송덕비'다. 단기 4290년(1957년) 3월 세웠다는 이 빗돌에는 '가나안 새마을을 건설하고 우리들 난민 150세대의 행복된 생활을 이룩하기 위하여 가지가지의 고난을 무릅쓰고 온 정력을 다하신 위대한 창설자'를 기념한다는 문구가 담겼다. 두 개의 빗돌은 법호촌에 각기 따로 놓여있었다. 방치되다시피했던 것을 뜻있는 사람 몇몇이 시온교회로 옮겼다. 이 과정에서 제주난민귀농정착단이 세운 빗돌은 두 동강나 버렸다. 시온교회 신자인 송철언씨(67)는 "지자체에서 비석을 복원하기 위한 예산 지원에 난색을 드러내더라"며 "교인들이 십시일반해야 할 것 같다"고 덧붙였다. 영천초는 두 개의 빗돌에 흔적이 배인 법호촌을 배경으로 탄생한 학교다. 법호촌 설촌 이후 10년쯤 뒤에 영천분교가 생겨났고 이어 본교로 승격했기 때문이다. 서귀포문화원이 펴낸 '우리고장의 설촌 유래'(2009)에 따르면 법호촌은 1955년 10월 6·25전쟁 피난민을 주축으로 한 제주난민귀농정착개척단이 입주하면서 마을의 면모를 갖췄다. 오랫동안 정주한 적이 없는 허허벌판에 비로소 마을이 형성된 것이다. 개척단장은 백원정 장로였다. 영천국민학교가 펴낸 향토지(1986)에는 당시 입주자를 150세대 700여명으로 기록해놓았다. ▲1980년대 중반 영천초 운동회 장면으로 토평초에서 제공한 사진이다. 초반엔 '가나안새마을'로 불리다가 사단법인으로 인가되면서 '제주도 사법보호위원회의 후원으로 이룩된 마을'이라는 뜻을 담아 법호촌으로 바뀌었다. 현재 법정지명은 상효동으로 토평동과 함께 행정동인 영천동에 속한다. 입주 당시 전체의 40%가 북한에서 건너온 사람들이고 20%가 제주도외 출신, 40%는 제주도민이었다. 입주자들은 국유지를 빌려 황무지를 농경지로 바꾸는 노력을 했지만 살림이 빠듯했다. 이런 현실이지만 자녀 교육에 소홀할 순 없었다. 마을 유지들로 학교설립추진위원회를 꾸려 교육계에 진정해 1962년 토평초 영천분교장 설립인가를 받았고 1970년에는 본교 승격을 이뤄냈다. 영천동이란 지명이 생기기전 영천악 이름을 따와 교명을 정했다. 영천동에 속한 법호촌, 돈내코만이 아니라 남원읍 양마단지 아이들이 영천초로 통학했다. ▲서귀포온성학교 여름방학 계절학교. 1977년 6학급 편성 이후 적정규모 학생수를 유지하던 영천초는 1996년 이래 학생수가 크게 줄어들었다. 학교 존속을 위한 지역주민의 노력이 이어졌지만 2001년 통폐합 갈림길에 서게 된다. 이 과정에서 통폐합을 둘러싼 갈등의 골이 깊어졌다. 몇차례 걸쳐 찬반 투표를 진행했지만 뚜렷한 결과를 못냈다. 2001년 9월 영천초살리기추진위원회는 결국 교육감에게 연명부를 제출해 통폐합을 청원하기에 이른다. 이들은 청원서에서 "돈내코 확포장 사업이 완료되고 5·16도로 확장사업, 국민관광단지가 완료되면 학생수가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며 "이러한 조건이 충족되면 다시 학교를 설립해달라"고 밝혔다. 폐교된지 올해로 10년째. 현재 영천초가 통폐합된 토평초의 통학버스를 이용하는 법호촌·돈내코 아이들은 20명에 불과하다. 산남 유일 특수학교로 지속 성장 2006년 옛 배움터에 서귀포온성학교 개교 특수학교 학생들이 여름방학을 잊었다. 장애학생들의 특기적성 활동을 돕고 부모들의 돌봄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계절학교가 여름방학 기간에 운영되기 때문이다. 서귀포온성학교도 예외가 아니다. 지난달 25일부터 보름간에 걸쳐 서귀포지역 특수교육 대상 학생이 참여하는 계절학교를 열고 있다. 태극권, 호신술, 북아트, 탈춤, 다도, 생활체육 등 운영 프로그램이 10여개에 이른다. 도내 특수학교는 제주영지학교, 제주영송학교, 서귀포온성학교 등 공·사립을 합쳐 3곳. 2006년 15학급 규모로 개교한 서귀포온성학교는 서귀포시 지역 장애학생들에게 특수교육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탄생했다. 서귀포온성학교가 개교하기 전에는 '산남'의 장애학생들이 제주시에 있는 특수학교까지 이동해야 하는 등 불편이 컸다. 2002년 폐교 이후 활용이 더뎠던 옛 영천초는 서귀포온성학교가 생기면서 배움터로 명맥을 이어갔다. 교정에 섰을 때 한라산이 한눈에 잡히는 풍경을 빼면 이국적 외양의 서귀포온성학교에서 영천초의 옛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연필과 책이 떠오르는 '영천초 옛 터전'조형물이 학교가 서있던 곳임을 말해준다. 영천초 옛 터에 부지를 추가 확보해 지은 서귀포온성학교는 현재 유치원·초등·중학·고등·전공 등 모두 28학급에 120여명의 학생이 재학하고 있다. 하지만 부지가 넉넉치 않아 지하층에 언어치료실, 음악실, 공예실, 미술실 등을 둔 점은 못내 아쉽다. 강옥화 교감은 "특수학교 설립은 장애아를 둔 서귀포지역 학부모들의 숙원사업이었다"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서귀포온성학교는 지금 산남을 대표하는 특수학교로 꾸준히 성장해가고 있다. 법호촌서 성장한 송철수 교장 "토박이 사라지는 법호촌 마을역사 차분히 정리를" "법호촌을 두고 '나뭇꾼 마을'이라고 불렀다. 먹고 살 일이 마땅치 않아 산에서 나무를 캐서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마을에 살던 피난민들에게 초기엔 쌀, 밀가루 같은 구호물품을 제공했지만 차츰 지원이 끊기면서 어려움이 컸다." 고향을 떠나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고단한 생활을 이어간 법호촌이었지만 학교 설립의 열망은 여느 마을 못지 않았다. 영천초는 분교장 시절을 포함 40년간 법호촌, 돈내코, 양마단지 아이들의 꿈을 키워줬다. 하지만 법호촌 일대 사람들의 정성으로 태어난 영천초는 폐교 이후 한동안 우범지역처럼 방치되어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이를 걱정하던 차에 서귀포온성학교가 개교한 것이다. "서귀포온성학교 개교 이전에 학교명을 영천학교로 짓자는 말이 있었다. 영천초가 있었던 곳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부에서 언젠가 학생수가 늘면 영천초가 다시 문을 열 수 있지 않겠느냐며 반대하더라." 개신교 신자인 송교장은 이즈음 법호촌 설촌 무렵에 탄생한 시온교회의 어제와 오늘을 정리하고 있다. 시온교회는 영천분교장 초기에 교실로 사용했던 곳이라고 했다. 그는 "마을에 남아있는 법호촌 토박이가 거의 없다"면서 "교회 자료를 통해 미약하나마 법호촌의 역사를 짚어볼 생각"이라고 덧붙였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저작권자 © 한라일보 (http://www.ihalla.com) 무단전재 및 수집·재배포 금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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