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이씨 묘비와 해안군 이억·제주 고씨 묘, 이억·경주 이씨 묘비. 이억은 제주유배 중 경주 이씨와 혼인하지만 왕실이 인정해주지 않아 서울에서 제주 고씨와 다시 혼인하게 된다. 이 때문에 이씨는 첩으로, 탐계군 등 자식들은 서자로 전락하게 되며, 적모인 고씨에게 욕설을 한 탐계군은 사형 위기에 처해진다. 서자 전락 탐계군, 계모·누이에 패행 저질러 삼수 유배 유배인 도운 여인들은 가족과 생이별에 첩살이 수모도 인성군의 2남인 해안군 이억은 제주 유배 중 경주 이씨 집안의 딸과 혼인해 탐산군과 탐계군 두 왕자를 낳았다. 이건 형제들이 유배에서 풀려 복권되자 종친부에서는 이들에게 정식성혼을 명한다. 그러나 해안군은 제주에 아내와 자식이 있다며 한사코 고사했다. 그러면서 가족이 상경해 함께 살 수 있도록 해달라고 청원을 냈으나 이뤄지지 않았던 것이다. 왕명에 못 이겨 그는 제주에서 호장을 지낸 바 있는 고상의의 딸과 다시 혼인을 했다. 제주에 있는 부인과 자식을 위한 배려에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같은 제주 출신 여인들이라면 아무래도 서로의 처지를 이해해주지 않을까 하는 마음을 가졌음직하다. 이억은 고씨와 정식 결혼한 이후에도 훗날 아들들이 결혼 적령기가 돼 왕의 허락을 받고 서울에 올라온 경주이씨와의 사이에서 1남 2녀를 더 낳기도 했다. 이억은 또 제주 고씨에게서 영창군, 영래군 두 왕자와 세 공주를 낳았다. 이들은 제주에서 태어난 탐산군, 탐계군과는 10살 이상 나이가 어렸다. 그러나 왕실이 제주유배 중 혼인을 인정해주지 않은 탓에 경주 이씨는 첩으로 전락하고, 그 자식들은 서자로 강등된다. 결국 부당한 대우를 참다못한 탐계군이 술을 마시고 적모(嫡母·서자가 아버지의 정실을 이르는 말) 고씨와 누이에게 욕설을 퍼붓는 사건이 일어나고 말았다. 왕실에서 적모는 사실상 어머니나 다름없다. 그래서 승정원일기는 이 사건에 대해 탐계군이 '패행(悖行·사람으로서 마땅히 하여야 할 도리에 어긋나는 행동)'을 저지른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탐계군은 이 일로 20년간 유배되는데 이때 탐계군을 사형시켜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었음을 왕조실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유배 죄인 탐계수 이면이 지은 죄는 온 나라 사람이 다 함께 분개하는 바이므로 왕법에 있어 용서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해부(該府)가 일죄(一罪)로 조율, 결정한 것은 실로 법률을 제대로 적용시킨 일인데도, 사형을 감면하여 주라는 명령이 뜻밖에 특별히 내려졌으니, 이것이 비록 성상의 살리기 좋아하는 덕성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강상(綱常)의 일죄를 어찌 일시의 차마 못하는 정치로 해서 높이거나 낮출 수 있겠습니까. 국법이 지엄한 만큼, 결단코 유배만으로 그칠 수는 없습니다. 사형을 감면하여 주라는 명령을 환수하고 당초의 조율대로 처단하도록 하소서."(효종실록 권20, 효종 9년 4월 16일) 당시 30대의 피 끓는 젊은 왕자로서는 억울하고 분통 터지는 감정을 도저히 참지 못해서 벌어진 사건이었다. 이 일은 왕실에서 풍파를 일으켰고 호된 경종을 울린다는 차원에서 산 첩첩 물 첩첩하다는 삼수갑산 유배에 처해졌다. 삭풍이 몰아치는 북쪽 변방에서 3년간 유배생활 후 따뜻한 남쪽바닷가 마을로 이배시키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이 기막힌 사연을 아는 해원군 이건은 조카가 남쪽으로 내려가는 도중에 위치한 경기도 양주(楊州)로 찾아가 만나 위로하며 시를 써 전한다. "북쪽 요새에 삼 년 유배살이/ 남녘바다로 만 리를 떠나니/ 서로 만나보기 온통 꿈만 같아/ 다시 헤어지자니 또 소리를 삼키네/ 산마루 쌓인 눈 수심 머금고/ 강기슭 매화 나그네 심정을 흔드네/ 봄볕처럼 이제 은택 베푸니/ 풀리는 은혜 언제쯤 드러나려나." 이건은 한 살 위의 형 이억과는 유배 중 한 방을 쓰기도 했으며, 시문을 계속 주고받으며 각별한 형제애를 나눴다. 그 형이 유배 중 낳은 탐계군에게 이건은 마치 친자식을 대하듯 애정을 표현하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어려운 처지에 놓인 왕족을 도와 그들의 생활을 돌보고, 사랑의 결실로 자식까지 낳았으며, 그들이 떠난 후에도 꿋꿋하게 자식을 키우면서 살았지만 조선 왕실은 제주여인들을 인정해주지 않았다. 그 결과는 가족이 생이별하고, 첩실로, 서자로 살다가 마침내는 유배형까지 처해지는 비극으로 나타났다. 이들의 충격적인 소식은 당시 제주섬에 널리 퍼졌을 것이다. 이후 유배인과 혼인관계를 맺었던 제주여인들이 "유배인을 따라가지 않겠다. 다만 자식을 의지해 살아갈 뿐이다"라는 결심을 하게 된 밑바닥에는 이런 일들이 깔려 있었다. /특별취재팀=표성준기자·김순이 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김익수 국사편찬위 사료조사위원·백규상 제주문화원 문화기획부장 <저작권자 © 한라일보 (http://www.ihalla.com) 무단전재 및 수집·재배포 금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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