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택은 아버지 김진구의 적거지였던 동천 오진의 집에서 유배생활을 하게 된다. 그는 '제주 동천 적거기'에 후세인들이 유배지를 기억하기를 바란다면서 동문 안 1리쯤에 있고, 가락쿳물이 그 앞을 지나고 있으므로 동천이라 이름 하며, 창을 열면 한라산이 보이는 집이라고 기록해놨다. 사진 오른쪽 나무(흰색 점선 표시)가 있는 언덕이 김춘택의 적거지와 인접한 소래기동산이다. 솔개가 있던 곳이라 해서 소래기동산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언덕은 지금도 그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유배지에서 만난 기녀 주인공 '별사미인곡' 지어 "송강 것에 비하면 더욱 완곡" 자부심 깃든 자평 김춘택은 제주성 남문 인근 적거지에 살 때 때때로 자신을 찾아온 이웃 기녀가 죽잠(竹簪·대나무 비녀)으로 쪽을 틀었다고 했다. 그리고 여성의 아름다움을 상징하면서 정절의 표시인 비녀를 꽂은 이 여인을 주인공으로 한 노래를 짓는다. 기녀가 무슨 정절이냐고 할 수 있지만 기녀야말로 사랑의 슬픔과 이별의 아픔을 아는 여자이기에 임금에게 버림받은 자신의 복잡한 심경을 투영하기에 제격이었다. 당시 유배인들 사이에는 송강(松江) 정철의 '사미인곡(思美人曲)'이 유행하고 있었다. 주자 등 여러 문장가의 글을 평한 '논시문 부 잡설(論詩文附雜說·잡설을 붙여 시문을 논함)'을 쓰기도 한 그는 문학평론가연하면서 가사문학의 대가인 송강의 작품에 대해서도 해설을 남겼다. "송강의 전후(前後) '사미인사(思美人詞)'란 것은 한글로 지은 것이다. 그가 쫓겨나 근심하고 괴로워하였기 때문에 임금과 신하가 만나고 헤어질 때를 남녀의 사랑과 미움 사이에 비유함을 취하여 그 마음의 충성됨, 그 지조의 깨끗함, 그 절개의 곧음, 그 말의 아름다움과 간곡함, 그 가락의 슬픔과 순정함은 굴평의 이소와 거의 쫓아 짝할 만하다." 한글로 지어진 송강의 '사미인곡'은 우리 국문학사에서 가사문학의 정점, 유배문학의 백미(白眉)로 일컬어진다. 국어 교과서를 통해 이를 접한 우리는 그 문장의 간절함과 유려함만을 알고 있는데 그것만으로는 그 작품이 지닌 가치의 반쪽을 배운 것에 불과하다. 원래의 '사미인곡'에는 음률이 붙어있었다. '사미인사(思美人詞)'에 곡조를 붙여 노래했기에 '사미인곡'인 것이다. 최근 국악계에서 원래의 음률을 찾아내 복원하는 작업이 이뤄지고 있다. '북헌집'에 제작 동기를 밝힌 것처럼 김춘택은 이 무렵 '사미인사'에 쫓아 화답해 한글로 '별사미인곡(別思美人曲)'을 짓고 있었다. 그는 우연히 유배지에서 사미인곡을 노래할 줄 아는 기녀를 만났던 것이다. 그리고 이 기녀는 공교롭게도 '그 가락의 슬픔과 순정함'을 제대로 노래할 줄 아는 제주 최고의 명창이었다. 그녀를 알게 되고, 그녀가 부르는 '사미인곡'을 듣게 되면서 그는 자신의 심정을 의탁한 자신만의 '별사미인곡(別思美人曲)'을 짓는 계기로 삼았던 것이다. 창은 우리 고유의 전통의 소리, 즉 성악인데 시조창(時調唱)과 가사창(歌詞唱)이 있다. 시조창은 일반적으로 비교적 쉽게 누구나 접근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가사창은 그야말로 전문가 수준이 아니면 부르기 어렵고 듣는 이로 하여금 감흥을 일으키기가 쉽지 않다. 더구나 '사미인곡'은 더욱 고난도의 창법이기에 전승의 맥이 끊어졌었다. 이런 최고 수준의 가사창을 귀가 번쩍 뜨이게 잘하는 여인을 제주에서 만났으니 작가로선 작품을 오래도록 전하고자 하는 염원을 당연히 품게 됐을 것이다. "옛날에는 소경으로 하여금 시(詩)를 외우게 하였는데 어째서 소경을 골랐는가 하면 소리를 잘 가려내기 때문이다. 기녀 역시 소리를 잘 아는 사람들이고, 더군다나 임금과 신하의 의는 그들이 알 바 아니겠지만 남녀의 정은 바로 모조리 익숙하게 알고 있는 자들이다. 정(情)을 진정으로 느낀다면 그것을 펴서 내는 소리는 더욱 충분히 사람을 감동하게 하리라. 지금 이 가사를 제주 기녀 중 노래를 잘하는 자에게 전하여 남겨서, 후에 듣는 자로 하여금, 그 사설을 통해서 그 뜻을 얻어 궁구(속속들이 파고들어 깊게 연구)하게 하려고 한다. 이리하여 나는 오히려 지기(知己)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지은 가사를 기녀로 하여금 몇 번이나 노래해 보게 하고, 시어가 창(唱)에 적절하지 않을 때는 음률에 맞는 시어를 고르고 다듬어가며 만들었을 것이다. 깊은 슬픔과 순정함을 머금은 소리, 화사한 젊은 기녀가 아니라 절조(節操)의 상징인 대비녀(竹簪)를 꽂은 담백한 삼베옷의 여인, 인생의 쓴맛 단맛을 다 겪은 초로의 여인의 곰삭아 잘 익은 소리로 부르는 임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그래서 김춘택은 자신의 '별사미인곡'에 대해 이런 자부심 깃든 자평(自評)을 하고 있다. "옛날에 임금에게 사랑받던 여자들이 애오라지 버림받은 내용을 이야기하는데, 그 대사가 송강(松江) 것에 비하면 더욱 완곡하고, 그 가락은 송강 것에 비하면 더욱 쓰라리다." /특별취재팀=표성준기자·김순이 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김익수 국사편찬위 사료조사위원·백종진 제주문화원 문화기획부장 <저작권자 © 한라일보 (http://www.ihalla.com) 무단전재 및 수집·재배포 금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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