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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유배인과 여인들
[제주 유배인과 여인들]조정철과 홍윤애(4)
혹독한 고문 참상 조정에 전해져 파장
표성준 기자 sjpyo@ihalla.com
입력 : 2012. 07.02. 00:00:00

▲충청북도 충주시 수안보면에 자리 잡고 있는 조정철 묘. 묘비에는 역모사건에 휘말려 목을 매 숨진 첫 부인과 유배가 풀린 후 얻은 두 번째 부인 사이에 '의녀 남양홍씨(홍윤애)'를 나란히 올려놓고 있다.

정조, 제주목사 등 3읍 수령 전원 교체
제주 민심 달래려고 윤음·어사도 파견

▲조정철 묘비

임금의 특명을 받고 부임한 제주목사가 유배인의 동태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사대부도 아니고 신분이 미천한 백성 한 명을 장살한 것은 당시 시대상으로 미뤄 그리 문제 될 것이 없었다. 목적이 정당하다면 수단은 합법화할 수 있는 시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증거도 없이 잡혀가 처참한 고문을 받다 숨진 홍윤애 사건은 당시 제주의 유배인들에 대한 허술한 관리와 함께 맞물려 조정에 큰 파장을 몰고 온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이후 김시구 목사는 도임 4개월 만에 파직당한 뒤 의금부로 압송되며, 제주판관 황인채와 대정현감 나윤록도 벼슬이 갈렸다. 정조는 또한 탐라수령을 잘못 추천했다는 죄를 물어 이조참판 김하재를 파직시켰으며, 홍윤애 사건에 거론되지 않은 정의현감까지 갈아치운다. 조선왕조 500년을 통틀어 제주 3읍 수령과 판관까지 한꺼번에 교체된 것은 그리 흔한 일이 아니다.

정조는 또 민심을 달래기 위한 순무어사를 뽑아 직접 작성한 윤음(綸音)을 내려보내면서 제주의 물정과 민요 속에 임금이나 나라를 원망하는 노랫말이 들어있는지와 사건의 전말을 조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도대체 홍윤애가 죽는 과정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가혹한 형벌을 받으며 기절을 반복하던 홍윤애가 억울함을 호소하다 스스로 목을 매게 된 사건 전후의 기록을 통해 관아에서 홍윤애가 고문당하는 장면을 상상해볼 수 있다.



홍윤애는 죽음 앞에서도 의연했다. 혹독한 고문과 함께 죄를 인정하는 말 한마디만 하면 목숨을 살려주고 상도 내리겠다는 달콤한 회유가 있었지만 김시구 목사가 쳐놓은 덫에 걸려들지 않았다. 홍윤애의 차분하고 당당한 답변에 이성과 체통을 잃은 것은 오히려 김시구 목사였다. 그는 홍윤애의 저고리 앞섶을 풀어헤쳐 젖가슴을 드러나게 하고 유두와 유방이 왜 이렇게 부풀었는가를 고문하였다. 당시 홍윤애는 딸을 하나 낳아 석 달도 채 되지 않은 때였다. 남자 앞에서 손을 내보이는 것도 삼가던 조선 시대에 여성의 수치심을 최대한 자극하는 이러한 고문의 참상은 고스란히 관아 밖으로 전해져 제주의 민심을 동요시켰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정조가 사건 직후 전라도 관찰사 박우원의 밀계를 받고 하교하는 장면이 나온다. "일이 비밀스러운 데 속한 것이라서 비록 상세히 하교할 수는 없으나, 그 가운데 한 가지 일은 엄중히 조사하여 실정을 알아내지 않을 수 없다. 간사한 죄를 범한 정절(情節·궂은일의 가엾은 정황)이 그지없이 망측하다."

조정철도 당시 참혹상을 이렇게 기록해놓고 있다. "나의 적거에 출입한 죄로 특별히 만든 서까래와 같은 매로 70을 헤아리게 때리니 뼈가 부서지고 근육이 찢어져 죽기에 이르렀다. 홍랑이 이 혹형 밑에 기절하면서도 입으로는 오히려 억울하다면서 재난을 당할 빛이 더욱 다급해지자 목을 매어 죽었다."

홍윤애가 죽고 제주에는 석 달 가까이 극심한 가뭄이 든다. 그리고 그해 여름 더위가 한풀 꺾일 무렵 멀리서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큰 폭풍우가 동이로 붓듯 내리치고 나무가 꺾이며 열흘이 가까워도 그치지를 않았다. 그때 조정철은 옥에 갇혀 있다가 섬 백성 사이에서 전설처럼 떠돌던 소문을 전해 듣는다. 홍윤애의 원기가 섬에 가뭄으로 인한 재앙과 폭풍우를 불러왔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이를 살리려다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무참히 짓밟힌 채 죽어간 홍윤애는 결과적으로 조정철의 목숨을 살려냈다. 그리고 홍윤애의 죽음은 역사성이 매우 강렬한 사건이었다. 당시의 조정을 발칵 뒤집어놓은 이 사건에는 치열한 당쟁에 의한 권력찬탈을 노린 반역, 억울하게 연루된 죄인의 유배, 절해고도에서의 목사의 권력 악용과 정적제거의 시나리오, 민심동요와 어사 파견 등이 골고루 얽혀 있다. 실로 조선의 당쟁과 유배의 모든 요소가 들어있던 것이다.

제주여인 홍윤애가 목숨을 바쳐 사랑하고 지키고자 했던 조정철은 조선의 당쟁과 유배의 역사에서 여러 가지 기록을 세운 인물이다. 종조부와 부친, 그리고 자신까지 한 집안에서 3대에 걸쳐 4명이 제주에 유배됐다. 또한 27세부터 55세까지 총 29년 동안의 최장기 유배생활에서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유배가 풀린 후에는 57세부터 관운이 트여 제주목사 직을 비롯해 형조판서까지 81세 동안 승승장구하면서 관직 생활을 이어갔다.

/특별취재팀=표성준기자·김순이 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김익수 국사편찬위 사료조사위원·백종진 제주문화원 문화기획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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