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대신을 암살하려 했다는 혐의를 받고 1907년 8월 제주에 유배된 박영효는 처음 석달간 조천 김희주 집에 머문다. 박영효가 머물렀던 사랑채는 이후 개보수되긴 했지만 아직까지 남아 당시의 정취를 느끼게 해준다. 갑신정변·명성황후 시해 음모 혐의로 2회 망명 이완용에 맞서 고종 양위 반대했다가 제주 유배 급진 개화파 주축 세력들은 박영효의 집에 모여 갑신정변 계획을 세웠다. 이어 새로 신설된 우정국 낙성식에서 온건 개화파인 사대당을 타도하고 혁신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거사를 단행했다. 수구파 거물들을 처단하고 신 정부 수립에 착수하면서 거사는 성공을 눈앞에 둔 듯했다. 그러나 정변 3일 만에 민비와 연락을 취한 청군이 1500명의 병력을 이끌고 공격해오자 박영효는 김옥균 등과 함께 '3일 천하'를 뒤로 한 채 일본으로 망명하게 된다. 정변이 실패해 일본으로 망명한 뒤에도 박영효의 개혁사상은 사그러들지 않았다. 그는 1888년 초 고종에게 국정 전반에 관해 13만 여자에 달하는 장문의 개혁 상소를 올려 봉건적인 신분제도의 철폐, 근대적인 법치국가의 확립에 의한 조선의 자주독립과 부국강병을 주장했다. 1893년 말에는 일본 유력 인사들의 도움을 받아 도쿄에 친린의숙(親隣義塾)이라는 사립학교를 세워 유학생들의 교육에도 힘을 썼다. 그는 일본 망명 중에도 조선 정부가 보낸 자객으로부터 몇차례 위기를 모면한다. 이어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간 지 10년 후인 1894년(고종 31년) 봄, 동학 농민군의 봉기를 계기로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 정부의 주선으로 귀국한다. 그리고 조선에 친일 세력을 심으려는 일본공사 이노우에(井上馨)의 지원을 받아 수립된 김홍집 내각의 내무대신으로 기용된다. 조선정부로서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지만 그는 군사·교육·행정 등 각 분야에서 강력한 개혁을 추진했다. 한편으로는 이노우에 공사의 요청을 무시하고 서울시내 일본 거류민의 상가 확장을 반대하는 등 자주정신도 잃지 않았다. 일본의 강압에 못이긴 고종이 황태자 순종에게 왕위를 물려주자 끝까지 반대했던 박영효는 이완용 등의 상소로 구속되고 만다. 당시 황제 대리청정 의식은 궁내부 대신이었던 박영효가 집행해야 할 업무였지만 그는 병을 핑계로 대궐에 나타나지 않아 식을 치를 수 없게 했다. 그러자 이완용은 스스로 궁내부 대신 임시서리가 돼 의식을 강행한 뒤 새 황제 순종에게 박영효를 처벌하라고 요청한다. "이번에 제위(帝位)를 주고받은 예전(禮典)은 종묘와 사직이 억만년토록 공고하게 될 기초여서 대소 신민치고 모두 기뻐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각 부문 해당 유사(有司)들은 도리상 당연히 자기 직책을 부지런히 수행해야 할 것인데 박영효는 태연히 직임을 회피하였는 바 그 정상(情狀)을 가릴 수가 없습니다. 이를 심상하게 그대로 둘 수 없으니 법부로 하여금 나문(拿問·죄인을 잡아다가 심문함)하여 정죄(定罪·죄가 있다고 단정함)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승정원일기. 1907년 7월 21일) 한일강제병합 때까지 3년여간 황제로 제위하는 동안 내각에서 올린 상소문에 대해 이의를 제기해본 적이 거의 없는 허수아비 황제 순종은 아뢴 대로 하라는 칙지를 내렸다. 이때 감옥에 갇힌 박영효가 배탈이 나 고생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약을 보내지만 한국에도 약이 있다면서 되돌려 보낸 일화가 전해진다. 한국 최고 법정인 평리원에서 재판을 받은 그는 민심을 선동했다는 죄목으로 태 80대를 맞고 풀려난다. 왕위 양이 문제로 이완용과 박영효가 맞선 일로 이완용이 매국노의 대명사로 악명을 떨치게 된 반면 박영효는 시대를 대표하는 지성으로 민중의 존경을 받게 된다. 일본은 한국 법정의 판결을 받고 처벌받은 그를 다시 경무청으로 연행한 뒤 고종 양위에 찬성한 이완용 등 정부대신을 암살하려 했다는 혐의를 뒤집어 씌워 1년의 감금형을 내리고 제주도에 유배시킨다. 민심이 온통 들끓고 있는 때 조야에 영향력이 막대한 그를 자유의 몸으로 두면 소요가 일어날지도 모를 일이었기 때문이다. /특별취재팀=표성준기자·김순이 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김익수 국사편찬위 사료조사위원·백종진 제주문화원 문화기획부장 <저작권자 © 한라일보 (http://www.ihalla.com) 무단전재 및 수집·재배포 금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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