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식은 제주 유배 중 아내를 잃은 뒤 평안도 출신의 의실을 아내로 맞고 아들까지 얻는다. 가운데 앉은 이가 의실이며, 왼쪽이 제주 유배 중 낳은 아들이다. 귤림시회 조직 지방 한문학 발달 기여 의실 만나 아들 낳은 뒤 집 마련해 이사 김윤식이 "콱 죽어버리고 싶다"고 했을 만큼 나라 안팎에서는 우울한 소식만이 전해졌다. 그러나 그는 시회(詩會)를 조직해 유배지에서도 조선 선비들이 즐기던 풍류를 잊지 않고 살았다. 유배인들끼리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김윤식의 유배지에서 시작한 이 시회는 시간이 흐르면서 제주지역의 상류층 인사들까지 참여해 제법 큰 규모를 자랑했다. '귤원(橘園)'이라고 이름 붙인 시회의 첫 모임은 유배온 지 약 40일 만인 1898년 4월 22일 열렸다. 이때 회원들은 소동파의 시 중에서 운을 뽑아 칠언율시를 지었다. 송나라 시인 소동파가 '적벽부'를 지은 때가 1082년 7월 16일이었다. '임술년 가을 7월 기망(旣望·음력 16일)에 소동파 나는 손님과 배를 띄우고 적벽의 아래에서 노닐었다'로 시작하는 이 불후의 명작이 탄생한 이후 조선의 선비들은 매달 음력 16일 기망이 되면 모여 시를 읊곤 했다. 귤원 모임은 기망뿐만 아니라 화분에 심은 매화꽃이 피었다는 이유로 열리고, 마당에 국화가 활짝 피었다는 이유로 다시 이어졌다. "매화 아래서 시를 지으니 참으로 적객 신세인 가운데도 좋은 일이었다"고 현실에 만족감을 표현했던 그는 유려한 글솜씨로 유유자적한 유배생활을 적나라하게 서술했다. 일상의 소소함도 역사의 일부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인지 자신은 물론 지인들의 축첩과 음주가무 등 현재의 시각으로는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일련의 행각들도 빠짐없이 기록했다. "오늘은 바로 기망이다. 여러 적객과 같이 용연에 배를 띄웠다. 바다의 파도가 크게 밀려와 용연과 서로 통하며 성난 밀물이 안(岸) 벽을 때리니 소리 나는 위세가 웅맹(雄猛)하여 참으로 장관이었다. 검은 구름이 모였다간 흩어지기를 무상히 하는데, 때로는 달빛이 새어나오기도 하고 혹은 가랑비가 내려 쓸쓸했다. 밤이 깊어가니 달빛도 자못 아름다웠다. 멀리서 뱃노래가 들리더니, 산저포에서 배가 흔들거리며 용연으로 들어왔다. 내가 탄 배 가운데 피리 부는 사람이 있어서, 노래와 피리가 서로 어우러졌다. 새벽 두 시가 되어 배에서 내려 돌아왔다."(1989년 9월 1일) 기망 놀이는 이들뿐만 아니라 제주의 상류층 사회에서 널리 행해지고 있었다. 김윤식 일행은 이날 용연에서 기망 놀이를 즐기던 중 산지천에서부터 배를 띄워 용연까지 건너온 읍내 젊은이들과 마주치기도 한다. 이듬해 9월 기망 때는 일행들과 공신정(拱辰亭·지금의 제주기상청 서쪽에 있던 정자)에 올랐다가 제주목사 이상규가 기망 놀이를 즐기는 것을 목격한다. 당시 환하게 불을 밝힌 배 위에서 피리와 북소리가 요란스럽던 목사의 기망 놀이를 성의 남녀들이 모여들어 구경했다. 그가 표현한 것처럼 굴레에 매인 슬픔을 풀기 위한 것으로 보기에는 지나치게 화려한 면이 있었다. 그러나 김윤식이 이끈 귤원시회(橘園詩會)는 유배인과 지방 선비들의 시회 활동으로 제주도의 한문학 발달과 중앙과 지방의 문화 교류에 이바지한 사실도 부인할 수 없다. 유배 중 제주성 안의 젊은이 등 여러 사람들이 한시를 지은 뒤에는 앞다퉈 그를 찾아 평가해달라고 요청한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오래 전 첫 부인을 잃은 뒤 새로 맞아들인 아내와 소실마저 계속해서 먼저 세상을 떠나버리자 그는 유배된 지 1년 6개월만인 1898년 여름, 평안도 의주 출신의 김씨 성을 지닌 여인 의실(義室)을 소실로 들인다. 의실은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어머니 노씨와 언니와 함께 난을 피해 제주에 들어와 살다가 김윤식을 만났다. "10년 이래 늘 아들에게 혈육이 없는 것만 생각하여 부인도 얻고 첩도 얻어 보았다. 형편을 알지도 못하면서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수군대며 웃곤 했는데, 어찌 줄줄이 죽을 줄 생각이나 했겠는가? 슬하에 마침 어린 것 하나 없이, 오직 부자 둘뿐이다."(속음청사. 1898년 8월 21일) 첫 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도 혈육이 없어 늘 후손을 걱정하던 그는 1899년 여름, 의실과의 사이에서 아들 영구(瀛駒)를 얻는다. 유배 3년째 되던 1901년 2월, 김윤식은 850냥을 주고 유배지에 이웃한 집을 사들인 뒤 이사한다. 김응빈 집에 머물던 그가 새 집을 마련한 것은 무엇보다 의실과 아들 영구를 위한 배려에서였다. 나중에 전남 지도로 유배지를 옮길 때 김윤식은 제주에 찾아온 큰 아들에게 의실 모자를 서울로 데려가 모여서 살 수 있도록 당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새 집에는 의실 모자와 의실의 모친, 제주 유배 때 따라온 나철, 이후 찾아온 친구 이민기, 품삯을 주고 일을 시키던 장정까지 데리고 살았다. 유배 중에도 떳떳이 살림을 차린 것은 김윤식뿐만 아니라 당시 대부분의 유배인도 마찬가지였다. /특별취재팀=표성준기자·김순이 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 김익수 국사편찬위 사료조사위원·백종진 제주문화원 문화기획부장 <저작권자 © 한라일보 (http://www.ihalla.com) 무단전재 및 수집·재배포 금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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