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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만평 연재 40여년… 대한민국 언론史에 '한 획'
[시사만화 '황우럭' 1만회 달성 의미]
조상윤 기자 sycho@ihalla.com
입력 : 2012. 11.29. 00:00:00

▲칠순을 목전에 둔 양병윤 화백은 세상의 모든 불평등을 향해 우럭의 등가시 같은 붓끝으로 '황우럭'에 계속해서 뜨거운 기운을 불어넣고 있다. 사진=강경민기자

격랑의 우리 현대사 살아온 산 증인
만화 인정한 '제주도문화상' 큰 보람

본보 시사만화 '황우럭'의 1만회 달성은 제주언론사는 물론 대한민국 언론사에 한 획을 긋는 '사건'이다.

황우럭을 연재하고 있는 양병윤(68) 화백은 현재 문화일보에 게재되고 있는 김성환 화백의 '고바우 영감(1987년 1만회 돌파)'의 뒤를 잇고 있다. 만평을 동시에 게재하는 사례는 처음이기 때문이다.

시대의 대변자로 족적을 남기고 있는 양 화백은 어려서부터 만화광이었다. 작가의 꿈을 키우며 독학습작을 하던 가까머리 그는 고교 2학년때 서울에서 발간되는 학생잡지 '학도주보'에 만평이, 월간잡지 '아리랑'에 만화가 실리면서 세인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1968년 제주신문 화백 겸 기자로 입사해 황우럭을 연재한 그는 제주신문 편집국장과 이사, 논설위원을 역임했다. 이어 제민일보 논설위원 등을 거친 가운데 2009년부터 현재까지 한라일보에서 세상을 평정(?)하고 있다.

▲시사만화 '황우럭'은 온갖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1만회 대하를 집념과 열정으로 건너왔다.

'황우럭'은 40여년간 민중의 애환을 함께 하면서 민의를 대변하고, 부정과 불의에 맞서 목소리를 내 온 격랑의 우리 현대사를 살아온 산증인이다. 60,70년대 유신독재정권과 80년대 서슬 퍼런 신군부 시절에는 혹독한 검열과 탄압을 특유의 익살과 '촌철살인'의 기지로 이겨낸 것으로 유명하다. 1990년대 문민정부와 2000년대에 이르기까지 시사만화 '황우럭'은 온갖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1만회 대하를 집념과 열정으로 건너왔다. 칠순을 목전에 둔 양 화백은 세상의 모든 불평등을 향해 우럭의 등가시 같은 붓끝으로 '황우럭'에 계속해서 뜨거운 기운을 불어넣고 있다.

다음은 양 화백과의 일문일답.

▶'황우럭'은=우럭은 제주도 연안에서 쉽게 잡을 수 있는 생선이기 때문에 도민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가기 위해서였다. 우럭 등가시가 단단하고 뾰족해 부조리나 비리를 가시로 찌르듯 쏘아붙여 비판하겠다는 의미도 내포돼 있다. 우럭 종류도 다양하지만 그 중 사람의 성씨로 쓰는 앞자가 '황'이어서 의인화를 위해 황우럭으로 이름을 정했다.

▶기자(화백) 입문=어렸을때 부터 만화를 무척 좋아했다. 학창시절 여러 잡지에 만화응모로 입상하기도 했다. 1968년 2월쯤, 고 김선희 제주신문 사장과 최현식 편집국장을 만난 자리에서 기자 겸 화백으로 채용하겠다고 해 수락했다. 3개월의 수습기간을 거쳐 그해 6월 부터 '황우럭'과 만평을 집필하게 됐다.

▲양병윤 화백은 '황우럭'과 함께 '만평'도 동시에 게재하는 등 여전히 열정이 가득하다.

▶만화와 만평은=우선 재미있어야 한다. 시사만화의 장르는 웃음 속에 슬픔이 녹아있어야 하고, 현실과 이상을 넘나들며 과장된 표현과 풍자를 엮어 간결한 선으로 터치하며, 모든 이들에게 만화를 통해 카타르시스를 제공해야 한다. 작가의 풍부한 체험과 관찰력을 동원할 수 있는 내공이 필요하다.

▶보람과 아쉬웠던 점=1986년 제주도 문화상을 수상했는데, 무엇보다도 만화를 인정해 주는 현실에 매우 감격했다. 반면 60~70년대 계엄하에 검열을 받으면서 은유법으로 표현한 작품이 일부 독자에게 리얼하게 접근하지 못한 것이 가슴 아프다.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엄청난 변화의 물결 속에 사람들의 심성이 각박해지고 있다. 배려하는 마음이 절실한 때다. 역지사지의 사고력을 품고 긍정적인 정신세계에서 건전한 비판이 있기 때문에 사람이 살아가는 데 그 의미가 보람일 것이다.

▶향후 계획이나 목표는=칠순을 목전에 두고 있다. 건강이 허락하는 대로 계속 만화를 그리고 싶다. 급변하는 시대에 허둥대고 싶지 않다. 인간 근본의 인성을 잘 가꾸고 살아가고 싶다. 내년 3월에 황우럭 1만회 돌파 기념 작품집 2권을 출간하게 돼 가슴이 벅차다.

만 번째라!

저 1960년대 3년 가운데서 하고 많은 날들을 나는 양병윤 형과 지냈지요.

산지포라 동문통이라 칠성통이라 원정통이라 남문통이라 서문통이라 광양이라 어디라 할 것 없이 함께 돌아다녔지요. 병윤 형은 도무지 지루해지지 않는 무궁무진한 우애의 샘물이 넘치는 그런 깊은 국량의 사나이지요.

첫째로 누구를 죽이거나 내치거나 하지 못하고 누구를 꼭 살려내는 그런 삶의 행로에 나섰지요. 누구에게 먼저 등 돌려 본 적도 없었지요.

그 묵은 의리 하나는 모태 안에서 나올 때 함께 몸에 감겨 나온 그것이었지요.

병윤 형은 속으로는 지극히 빛나는 슬기를 가득 채우고 있음에도 겉은 낮은 구름 총총으로 어리수굿하고 말지요.

나는 이런 귀중한 병윤 형하고 더불어 아침 해도 맞이하고 지는 해도 보내드렸지요.

이 탐라 보배의 시사화백 양병윤 형은 하루도 그냥 두지 않고 그믐달이 초승달이듯 멈출 줄 모르는 '황우럭' 1만회 꼭대기를 넘어섰다니 과연 설문대할망의 핏줄 아니고는 못할 장거이지요.

이 만 번째 다음 날 우리 모여들어 병윤 형의 잠들지 않는 세월을 새삼 칭송치 않을 수 없지요.

정녕코 이는 한국현대만화사에서 고바우 김성환의 그것과 함께 앞서거니 뒤서거니 서울이거니 한라산 기슭이거니 하고 대칭을 이루었지요. 그리운 병윤 형 옛날 한일소주 명월소주 귀일소주 한 병씩 내 마음이 보내드리오. 축하하오. <고은(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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