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판에서 136㎞ 떨어진 로타에는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이 주둔하면서 갱도진지 등으로 요새화했다. 로타섬의 송송빌리지 전망대에서 본 송송마을과 타이핑고트산. 이승철기자 1930년대부터 한인 100여명 이주 일제에 의해 사탕수수 재배 동원 식민시기 끌려간 한인 1세대 후손들은 김치맛을 기억 당시 전쟁무기와 시설 등은 박물관 등 관광자원으로 활용 6인승 경비행기 안에서 내려다보이는 바다는 마치 거대한 짙푸른 대지 같다. 바다는 미동조차 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파도는 하얀 점처럼 박혀있고..., 그 위로 조각구름이 빠르게 흘러간다. 이처럼 고요하고 평화롭기만 한 바다는 지난 세기 제국의 바다, 침략의 바다였다. 전쟁의 소용돌이가 모든 것을 집어삼키던 시절이었다. 새벽에 갑자기 쏟아지는 스콜을 뒤로하고 사이판 국제공항을 이륙하길 30분 정도 됐을까. 도착한 로타공항에서부터 태평양전쟁의 상흔과 마주했다. 공항 청사 옆에는 바다에서 건져 올린 듯한 일본군 비행기 프로펠러 등이 전시돼 방문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로타는 사이판에서 남쪽으로 136㎞ 정도 떨어져 있다. 사이판과 괌의 중간에 있으며 면적은 125㎢, 인구는 2000명 정도 거주하는 자그마한 섬이다. 로타는 사이판이나 티니안, 괌 등과는 달리 일본군과 미군과의 전면적인 지상전이 펼쳐지지 않았다. 미군은 이 섬에 함포사격을 퍼부었지만 상륙전은 전개하지 않았다. 하지만 태평양전쟁 시기에 상당수의 일본군이 이 섬에 주둔하면서 지하 갱도진지와 포대 등으로 요새화했다. 미군에 의해 점령된 뒤에는 일본 본토 공습을 위한 B-29폭격기의 기수 방위를 무선으로 경고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일본군들은 제주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처럼 지하 갱도를 뚫고 미군의 상륙에 대비했다. 지하 갱도는 포대를 감춰놓고 요새화 한 전투용 진지와 내부를 야전병원 등 특수목적의 시설 등으로 이용한 경우도 있었다. 현지인들이 태풍 등에 대비한 피난처 등으로 이용되고 있기도 하다. 해안에서부터 사바나초원의 고지대에 이르기까지 일본군이 만들어놓은 전쟁시설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로타공항에 전시중인 항공기 프로펠러 이 박물관은 6만 년 전에 생성된 천연동굴을 활용하고 있다. 길이는 60~70m, 너비는 가장 넓은 곳이 20~30m, 높이 10여m 규모다. 태평양전쟁 시기 일본군은 이 곳을 탄약고로 이용했다. 일본 패전 후에 민간인이 전쟁무기를 비롯 다양한 유물들을 모아 1991년 박물관으로 개관했다. 내부에는 당시 사용했던 전쟁무기들이 발 디딜 틈 없이 빼곡하게 전시되고 있다. 로타의 일제 군사시설은 송송빌리지 전망대를 중심으로 분포한다. 송송빌리지 전망대에서는 로타의 중심지인 송송마을과 마치 케이크처럼 보이는 타이핑고트산의 풍경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송송마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는 곳에 일본 제국의 첨병으로서 남양군도의 식민지 경영을 사실상 주도했던 남양흥발 로타 제당소가 있다. 로타 제당소는 이 섬 정상부에 광활하게 펼쳐진 사바나초원에서 재배된 사탕수수를 원료로 가공했다. 해발 496m의 사바나초원은 이 섬에서 가장 높은 고원지대다. 조선총독부 등의 비호아래 수많은 한인들을 남양군도로 동원한 남양흥발은 제당업 육성을 위해 1930년대 로타섬에 진출했다. 일제에 의해 강제 송출된 한인들도 사이판을 중심으로 티니안, 로타 등으로 이주했다. ▲갱도 안에 감춰진 일본군 포대. 전범기업인 남양흥발은 한인들을 사탕수수 농장에 동원했다가 후에는 군속으로 바꿔버린다. 로타 제당소의 노무자 약 2000명도 사이판 티니안 등 각지의 해군특수공사에 동원됐다. 사이판에서처럼 한인들이 많은 희생과 고통을 겪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아직까지 정확한 실상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 후 70년이 흐른 지금, 이 섬에는 한국인 가족 1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섬에서 가장 큰 마트를 운영하는 박영혜씨는 정착한 지 25년째 된다. 박씨의 증언은 이 섬에서 한인들의 희생이 많았음을 짐작케 한다. "3~4년 전 로타리조트 내 수영장에서 한국인 위령제를 지냈다. 젯상에 올릴 음식 대부분은 한국에서 가져왔고, 상복을 입고 대성통곡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아버지, 아버지 하면서 정식으로 위령제를 지냈다. 나는 집에서 밥만 지어서 위령제에 갔었다. … 내가 이주했을 당시 식민지 시기 이곳에 끌려온 한인 1세의 아들이 있었다. 그에게 김치를 줬더니 아버지가 김치를 만들어줘서 맛을 알고 있었다고 하더라. … " 한인들의 희생과 아픔은 이젠 과거의 잊혀진 기억이 되고 있다. 흔적도 차츰 사라지고 있다. 당시 한인들이 사탕수수 재배를 했던 사바나 초원의 정상부엔 스산한 바람만이 분다. <저작권자 © 한라일보 (http://www.ihalla.com) 무단전재 및 수집·재배포 금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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