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발굴된 '제주목도성지도'의 일부. ①동치성 위는 '청풍대'로 표시돼 있고 ②는 '일각'이라 돼 있다. ③은 제주성내에 있던 6과원 중 중과원에 해당된다. 이외에도 많은 건물지가 표시돼 있다. 사진=한라일보 DB 학술규명·보존·정비 통해 역사문화경관 가치 살려야 제이각·청풍대 논란 과제로 조선시대 읍성은 성 내부의 배치 구조가 거의 흡사하다. 즉 동문과 서문을 잇는 큰 길을 중심으로 북쪽에는 관아가 배치되고 남쪽에는 주로 백성들과 관련된 민가, 시장 등이 자리한다. 제주도의 경우는 어땠을까. 다른 지방처럼 성 내부 북쪽에 제주목관아가 자리했다. 많은 관아건물이 들어서고 민가도 배치됐다. 조선시대 전국에 산재한 성곽의 배치구조를 대부분 따른 것이다. 제주성에는 동문·서문·남문 3문이 있었다. 북문이 없는 상태로 전체적으로는 T형 구조를 보여준다. 동문과 서문을 잇는 큰 길과 정문인 남문에서 이어지는 길이 만나는 구조였다. 길을 중심으로 관아와 민가가 들어섰고 시장이 형성됐다. 성의 정문은 대부분 남문이었다. 간혹 동문을 정문으로 삼은 경우도 있지만 드물다. 제주성도 정문은 현재의 제주시 남문로터리에 자리했던 남문인 정원루였다. 정원루는 지형상 제주성과 바다를 조망하기에 좋은 위치다. 그러나 간혹 동문을 정문으로 삼거나 지형에 따라서는 북문을 정문으로 삼은 읍성도 없지 않았다. 전북 고창읍성은 북문을 정문으로 삼은 경우이다. 제주성은 다른 지방 성곽의 배치구조와 유사성을 띠면서도 지역적 독특성을 보여준다. 이와 관련 최근 발굴된 『제주목도성지도』는 주목된다. 1724년부터 1754년 사이에 제작된 이 지도에는 그동안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제주성 건물지와 과원 위치 등이 표시돼 있다. 주목되는 부분은 제주성 남성 옆 치성 위의 누각이다. 이곳은 제이각으로 알려져 왔으나 지도에는 흐릿하게 '청풍대'라는 글씨가 적혀있다. 제이각과 청풍대를 둘러싼 논란이 분분한 것이다. 제주시가 이곳을 정비하기 위해 지난 해 발굴 결과 凸형 건물 기단부가 확인됐으나 정확한 성격은 알 수 없는 상태이다. 문헌 및 고고학적 검토를 통해 제이각 혹은 청풍대를 규명하는 작업이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어쨌든 치성 위에 凸형 누각이 확인된 경우는 전국적으로도 매우 드물다. 치성(雉城)은 성벽에 달라붙는 적을 공격하기 위해 바깥쪽으로 돌출해서 쌓은 성곽을 말한다. 꿩이 자신을 숨기고 밖을 엿보는 모습을 빗대서 불리게 됐다고 한다. 이 시설이 반원형이면 곡성, 네모꼴이면 치성이라고 했다. 치성 위에는 포루가 설치되기도 했다. 제주만의 독특성을 보여주는 요소는 또 있다. 바로 과원이다. 조선시대 제주인들은 감귤을 진상하느라 많은 고초를 겪는다. 제주성 안에도 동·서·남·북과원과 중과원, 별과원 등 6곳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제주목도성지도』에는 실상이 파악되지 않았던 과원 위치가 뚜렷하게 나타난다. 과원에서는 왕실용으로 진상이 이뤄졌다. 민가에서 심은 감귤의 경우도 숫자를 하나씩 세어 표시했다가 조금이라도 축이 나면 벌을 주었다. 그 고초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칠성대 역시 주목해야 할 제주성의 독특한 자원이다. 북두칠성 모양으로 돌을 쌓아 대를 만들어 탐라시대부터 제사를 지내던 칠성대는 1926년 사진자료까지 남아있다. 뿐만 아니라 해자는 탱자나무로 이뤄졌다. 『남사일록』에는 '성 둘레에 깊은 도랑을 파고 두루 탱자나무를 심었다'고 했다.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한 용도인 해자에 물을 흐르게 하는 대신 탱자나무를 심은 것이다. 이처럼 제주성은 다른 지방과는 차별되는 고유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성곽사적으로도 중요성이 크다. 더 늦기 전에 학술 규명과 보존ㆍ정비를 통해 제주 고유의 역사문화경관으로서의 가치를 되살려 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저작권자 © 한라일보 (http://www.ihalla.com) 무단전재 및 수집·재배포 금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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