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의 노비 시인 정초부(1714~1789)는 주인 여춘영에게 벗처럼 가까운 사이였다. 여춘영은 정초부가 죽자 그를 묻고 돌아오는 길에 "삼한 땅에 명문가 많으니 다음 세상에는 그런 집에서 나게나"라고 읊조렸다. 노비 출신이 시인으로 당대에 이름을 날린 일도 특이하지만 주인이 그를 오랫동안 벗으로 대한 일도 흔치 않다. 대부분의 노비들에겐 학문을 탐구하거나 지배층의 배려를 받는 일은 먼 나라 이야기였다. 노비가 지적 능력을 타고나지 못했거나 노비주들이 한결같이 부도덕한 인간들이어서가 아니다. 노비는 신분제의 속박에 따라 대대로 주인가에 예속된 소유물이었고 주인들의 관심은 오로지 그들의 경제적 가치에 집중되기 마련이었다. 노비에겐 대개 세 가지의 선택지가 주어졌다. 신분적 억압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최소한의 생계를 보장받는 대신 주인가에 노동력을 제공하며 일생을 보내는 일이 그 하나다. 다른 하나는 도망을 가거나 기존의 사회질서에 대한 전복을 꾀하는 식으로 저항을 시도하는 방법이다. 마지막으로 경제적 성장을 활용하거나 군공을 세우는 방식으로 합법적인 면천을 도모하는 길이 있다. 고려대 역사교육과 권내현 교수가 쓴 '노비에서 양반으로, 그 머나먼 여정'은 이같은 신분제 사회인 조선에서 양반을 꿈꾸었던 한 노비 가계의 2백년 이력을 기록해놓은 책이다. 17세기 말부터 19세기에 걸쳐 양반이 되려고 했던 김수봉이라는 어느 노비 집안의 멀고도 험난한 여정을 구체적으로 추적했다. 주인공인 노비의 가계와 그를 둘러싼 주변 인물을 추적하는 데 활용한 주 자료는 호적대장이다. 당대의 호적대장을 통해 신분 상승을 꿈꾼 그들의 현실과 실상을 밝혔고 아울러 조선시대 하천민들의 신분 성장사까지 포괄적으로 분석했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조선시대의 평범한 인물들에 대한 정보가 호적만큼 방대하게 기록된 자료는 드물다. 조선시대 상위 신분인 양반은 소수에 불과했고 인구의 절대 다수는 평민이나 노비같은 하천민이었다. 그 가운데 많은 이들이 자신을 가로막고 있던 사회적 장벽을 뛰어넘기 위해 노력했다. 그 방향은 양반 기득권의 직접적인 해체가 아니라 모두 다 양반이 되는 독특한 길이었지만 근대 이후 적어도 관념적으론 상당한 성취를 이루기도 했다. 이와관련 지은이는 "이 책은 어떤 의미에서 다수의 한국인들에게 잊힌 그들의 선대에 관한 기록의 복원이기도 하다"고 적었다. 역사비평사. 1만2800원. <저작권자 © 한라일보 (http://www.ihalla.com) 무단전재 및 수집·재배포 금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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