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전시로 옷을 갈아입느라 문 열린 공간이 많지 않았다. 그래도 천경자의 그림과 그가 쓰던 화구 등을 보여주는 상설전시실이 있어 그 방으로 관람객들이 몰려 들었다. 얼마전 집안일로 서울에 머물렀다가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을 찾았다. 일제강점기에는 경성재판소, 해방 이후엔 대법원으로 사용하던 건물을 새롭게 고쳐 2002년부터 서울시립미술관으로 쓰고 있는 곳이다. 미술관 내부만이 아니라 건축물을 보기 위해 그곳으로 걸음을 옮겨놓는 이들이 눈에 띄는 이유다. 8년전 쯤의 일이다. 가동을 멈춘 공장 등을 문화공간으로 탈바꿈시켜 지역을 재생시킨 사례를 돌아볼 일이 있었다. 영국의 테이트모던은 1947년 지어진 화력발전소를 리모델링한 미술관이다. 1981년 발전소가 문을 닫은 뒤 흉물로 변했던 그 곳을 2000년 미술관으로 탄생시켰다. 중소도시 게이츠헤드의 발틱현대미술관은 제분소 건물이라는 과거를 지녔다. 칼스루헤 예술미디어센터인 독일의 ZKM은 2차 세계대전 당시 탄약 공장이었고 이후 70년대까지 제철소로 쓰였다. 베를린의 타클레스는 백화점 등이 들어섰다가 방치된 건물로 1990년 독일 통일 이후 아트센터로 변신했다. 같은 도시의 쿨투어 브라우어라이는 술을 빚던 시설을 말그대로 문화양조장으로 바꾼 곳이다. 해외 교류 창작실을 운영하는 베타니엔은 병원 건물을 개조해놓았다. 이들이 보여준 도시재생은 어마어마한 크기의 빌딩을 짓는 일이 아니었다. 오래된 건축물을 밀어내고 그 자리에 새 건물을 지어 상권을 가꾸는 식의 도시계획과는 거리가 멀었다. 장소의 역사성을 고스란히 살리면서 사람과 문화를 중심에 뒀다는 공통점을 만났다. 지역 주민의 자부심으로 그 공간들은 도시의 명소로 커나갔다. 엊그제 제주도가 '원도심 문화재생'을 2015년 문화분야 중점 추진 과제로 발표했다. 제주시 삼도2동 옛 제주대병원 건물 일부를 제주종합문화예술센터(가칭)로 만들겠다는 내용이 골자였다. 그동안 제주도정이 도시재생을 외치면서도 제주성안 사람들이 걸어온 흔적을 담고있는 건축물에 대한 보존과 활용엔 눈을 감았다는 점을 떠올리면 의미있는 행보다. 하지만 창작·전시·공연 인프라를 조성한다고 가쁜 숨을 쉬는 원도심에 생기가 도는 것은 아니다. 도시의 기억을 품지 못한 채 제주에 흩어진 수많은 문화공간과 다를 바 없는 시설을 제주시 원도심에 하나 더 세우는 일이라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다. 더욱이 문화예술인, 주민, 관광객 등 '3인 3색'이 될 수 밖에 없는 이용객의 성향을 모두 만족시키겠다는 계획은 실현성이 부족해보인다. 제주종합문화예술센터만 홀로 우뚝할 것이 아니라 제주시 원도심에 남아있는 오래된 건축물을 어떻게 보존하고 쓰임새를 구할지에 대한 궁리가 동반돼야 한다. 사업추진 부서가 달라서인지 모르겠으나 탐라문화광장 대지에 있는 고씨 가옥 활용 방안은 이번 '원도심 문화재생'에 언급되지 않았다. 도시재생은 원도심 사람들의 지속가능한 삶을 위한 방안 중 하나다. 낡은 건물을 단장하는 수십억원대 사업으로 생색낼 일은 아닌 것 같다. 새해, 도시재생을 위한 긴 호흡의 정책을 기대한다. <진선희 사회문화부장> <저작권자 © 한라일보 (http://www.ihalla.com) 무단전재 및 수집·재배포 금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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