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건너 내리는 대지를 적시는 비가 한라산 자락의 초록빛을 더 완연하게 만들고 있다. 한 시절을 푸르게 수놓기 위해 생명의 본질에 충실 하려는 나무들은 숲을 이룸으로써 대지의 넉넉함과 풍요함을 만들고 필자의 생각까지 녹음으로 여백을 만들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나른한 오후 창 너머 빗물을 튀기면서 달리는 자동차바퀴들이 바람과 부딪치는 잡음에 여운이 되어 끊임없이 나의 귀 언저리에서 솨~아 솨~아 솨~아 하고 지속성을 갖는다. 이런 시간들의 흐름 속에 내 영혼을 맡겨놓고 있다. 논어의 시작은 음과 양 지금 나의 손에는 언제 적부터 꼭 끝까지 다시 한 번 읽어내고 말겠다는 신념 같은 의지를 세웠던 '논어'라는 고전이 들려있다. 그 유명한 논어는 어디서 출발했는가? 논어는 공자가 2천 년 전 춘추전국 시대에 거친 황야를 떠돌면서 세상을 보는 시각이었는데 지금 내가 이 속에서 삶에 진리를 찾아보려 하고 있다. 공자는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근본의 기준은 인(仁)에서 출발한다고 후학들에게 말한다. 필자는 논어이야기를 중반쯤 읽고 나온 지금, 논어도 음과 양에서 시작한다는 생각을 한다. 우주의 질서와 끝 모를 팽창에서 오는 혼돈은 양극이면서 또 다른 측면에서는 음과 양을 의미하며 이는 상호 교류하고 조화를 통해 생명을 탄생시키고 균형을 유지시킴으로써 현재를 존재하게 한다는 이치라는 것이다. 소우주라 하는 인간 속에는 이성이라는 생존을 위한 합리적 질서의식이 있는 반면 끝없는 번식과 창조의 공간이라는 감성이 존재한다. 이성과 감성 어느 쪽에 비중이 있는가에 따라 법률가, 예술가로 나누어지기도 하겠지만 두 성 간의 적절한 조화가 균형 있는 삶을 찾는 길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스친다. 지금도 여운이 남는 책 '지와 사랑' 고등학교시절 읽고 지금도 여운이 남아있는 한 권의 책이 있다. 바로 독일작가인 헤르만헤세가 1930년에 인간을 지배하는 본성을 파헤친 작품 '지와 사랑'이라는 책이다. 마리아브론 수도원에서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라는 두 사람이 만나고 나르치스는 '지성'을 상징할 만큼 사제로서의 기초적인 욕구만을 제외하고는 엄격한 이성의 통제 속에서 성숙한 인간으로 무르익어간다. 그러나 깊은 심연에서는 골드문트라(감성)는 사람을 그리워한다. 골드문트는 사제수업을 받으면서 끊임없이 자라는 감성의 연못 속으로 빠져든다. 그래서 수도원을 나와 원초적 본능에 길을 따라 나그네로서 애욕, 선과 악, 죽음, 페스트라는 전염병을 거치면서 처절하게 세속적 삶을 걸어간다. 그리고는 감성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조각예술에 빠져들기도 한다. 희노애락, 오욕칠정, 그것들 모두를 삶에 중심으로 끌어들였다. 그리고는 방황의 끝자락에서 마음 한편에서 늘 그리워하던 나르치스(이성)가 있는 수도원을 다시 찾는다. 여기서 세속을 떠나 미소 짓는 인류의 어머니 마리아상을 조각하고는 나르치스 품에서 사랑한다는 진심을 이야기한다. 둘 모두가 서로를 그리워하고 어느 하나만으로는 완성된 인간으로 살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골드문트는 세상을 떠난다. 우리가 보기에 이성과 감성은 극과 극인 것처럼 비춰질 수 있다. 절제와 번식이 그러한 것이다. 공자는 사람이 도리를 다하기 위해서는 예(禮)를 갖추어야 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여기에 음악은 왜 필요한가? 인간은 절제와 도리만으로는 완성될 수 없다는 메시지인 듯싶다. 그러고 보면 헤르만헤세라는 사람이 동양철학의 핵심을 아주 쉽게 풀어왔던 것이었음을 지금 이 나이에 여기서 만나는 듯싶다. 지성과 감성은 돌고 돌아 하나로 논어해설집 한 자락에 이런 해설이 눈길을 끈다. 군자는 의(義)에서 깨닫고 소인은 이(利)에서 깨닫는 다고 했다. 도올선생은 이런 해석을 양극으로 풀지 않고 군자는 이(利)를 알고 의(義)를 행하는 자를 말한다고 한다. 즉 지성과 사랑(감성)은 마치 양극 점을 달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중심점에서 양방향으로 출발하여 지구를 돌고 인생을 돌고 결국은 하나로 만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우리는 일상을 살면서 선과 악으로 나누어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면서 괴로워한다. 그리고 성공과 실패의 기준을 정해놓고 갈등하고 자학하며 슬퍼하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궁극적으로 희구하는 것은 행복이라고 한다. 그러나 두 글자의 무게는 어느 것이 더 무겁다거나 가볍다 할 수 없는 듯하다. 여기서 '충(忠)'은 나 자신에 대한 충(忠)일수도 있고, 공동체에 대한 충(忠)일수도 있으며 생명체에 대한 충(忠)일수도 있다. 또한 '충(忠)'은 나에 대한 이익보다 남에게 배려하는 합리적 충(忠)을 생각해야 한다. 결국에는 모든 길이 한곳으로 방향을 잡고 있음에 전율하게 됨을 다시금 느낀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생각으로 힘들어한다면 이러한 인문학의 바탕에서 제시한 섭리에서 해결의 묘법을 찾아보는 것은 어떠한지 길을 안내해 본다. 행복은 두 갈래의 마음이 하나될 때 나의 내면에서도 예쁜 꽃을 보면 꺾고 싶다는 욕망과 그것도 생명체로서 존중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대립한다. 두 갈래의 마음이 하나로 합쳐지는 지점에 이르렀을 때 우리 행복이란 지점에 이른 것이 아닌가 싶다. 욕망, 열정 이런 감성들이 이성과 합치가 되어 통섭의 순리를 낳는 그 지점을 말하는 것이다.<수필가> <저작권자 © 한라일보 (http://www.ihalla.com) 무단전재 및 수집·재배포 금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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