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가까운 지인이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사랑의 열매'에 고액을 기부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너 소사이어티(Honor Society)회원 자격의 기부인 셈인데 1억 원 이상의 고액 기부자를 일컫는 말이다. 그런데 테이블 여덟 개를 놓고 6000원짜리 해장국집을 운영하는 분이다. 1억 원이면 1만6666그릇을 팔아야 하고, 하루에 45그릇씩 365일을 장사해야 모을 수 있는 거액이다. 이것은 경악이고 경외일 수밖에 없다. 문득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말의 뜻이 혼란스러웠다. 일반적으로 '사회적 지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곤 하는데 우리 사회에서 실제로 공감이 되는 말인가.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도덕적 의무라는 향기를 내고 있는가. 이처럼 고고한 의무는 차치하고라도 역할은 제대로 인식하고 있는가. 20대 총선이 한 달 정도 남았다. 각 정당의 후보들은 자타가 인정하는 우리 사회의 지도층이며,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후보들이라고 할 수 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기대해도 좋을 만큼 사회적 지위를 획득한 분들이다. 그런데 도덕적 의무라는 돋보기를 대고 보면, 어느 누구도 그럴 가능성은 찾지 못할 것 같다. 심지어 국회의원으로서의 역할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게 된다. 지난 2014년 동시지방선거를 돌이켜보면, 도의원 후보들과 도지사 후보의 공약이나 선거 유세 중의 말들은 참으로 공소(空疎)했고, 무책임한 현혹(眩惑)들이었다. 왜냐하면, 지방의회의 역할은 제주도민을 대신해서 도정의 예산 심의, 의결과 감사 그리고 조례에 관한 권한을 위임받았다. 그런데 공약의 대부분을 지역구 행정적 차원의 사업들로 내걸었다는 것은 오만의 소치인지, 지역구민들에 대한 농락인지, 역할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무지였는지 참혹했기 때문이다. 도지사 후보들이 내걸었던 핵심 공약들도 제주도가 독립국가이거나, 어느 지역이라도 포클레인으로 한 길 정도만 파면 금강석이라도 나올 것처럼 환상을 심어주기에 충분했었다. 수평적 협치 체제 구축, 1차 산업의 제주 신 성장 산업화, 삶의 질이 높은 복지공동체 구현 등이나 토종자본 4조원 조성과 매년 5000개 일자리 창출, 1차 산업 친환경산업 전환, 제주도 교육특구 및 무상 해외유학 지원 등의 공약들이 제주도 스스로 가능한 일인가. 노블레스 오블리주까지는 아닐지라도 현실 인식이며 역할에 대한 인식마저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제, 20대 총선에 거는 도민의 기대는 허황된 공약이 아니다. 제발 행정부가 해야 할 일을 하겠다고 나서지 말라. 민의의 대변자로서 입법기관의 역할에 충실할 수 있는 공약을 제시해 달라. 제주도를 위한다면 불공정하거나 불평등한 것만이라도 제대로 감시한다는 공약을 제시하라. 그리고 도민들 앞에서 겸허를 생각하라. 바늘구녕만한 예지(叡智)의 저쪽에 사는 사람들이여 / 나의 현실(現實)의 메에뜨르여 / 어제와 함께 내일에 사는 사람들이여 / 강력(强力)한 사람들이여… - 김수영의 <예지(叡智)> 중 겸허를 배우고 나서야 자신의 공소한 인식을 가지고는 판단할 수 없는 제주도민들을 보게 된다. 중요한 것은 현실의 상황 속에서 어제를 살아내고 내일을 살아갈 도민들의 삶이며, 그 속의 사람들이야말로 문제 해결의 중심이라는 인식에서 '강력한 사람들'이다. 지금은 바늘구멍만한 예지를 통해 부정을 정의로 되돌리는 일이 아니라, 이미 변화의 힘을 가지고 있는 제주도민들을 보며 겸허를 배우는 일이다. <좌지수 시인·문학평론가> <저작권자 © 한라일보 (http://www.ihalla.com) 무단전재 및 수집·재배포 금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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