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n라이프
비극적 인생이 던지는 잔혹한 농담
권여선 소설집 '안녕 주정뱅이'
이현숙 기자 hslee@ihalla.com
입력 : 2016. 06.10. 00:00:00
"산다는 게 참 끔찍하다. 그렇지 않니?(소설 '봄밤')". 첫 장부터 '한숨', 아니 '큰 숨'을 쉬게 한다.

소설가 권여선이 다섯번째 소설집 '안녕 주정뱅이'를 냈다. 2013년 여름부터 2015년 겨울까지 바지런히 발표한 '봄밤' '삼인행' '이모' '카메라' '역광' '실내화 한켤레' '층' 등 일곱편의 단편을 묶었다. '안녕 주정뱅이'란 제목을 가진 표제작은 없지만 수록작품에는 술 마시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이유는 제각각이지만 그들은 습관적으로 혹은 무언가를 견디기 위해 술을 마신다.

첫 수록작품 '봄밤'에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두 남녀가 등장한다. 스무살에 쇳일을 시작해 서른셋에 일으킨 사업으로 제법 돈을 벌지만 곧 부도를 맞아 아내에게 버림받고 서른아홉에 신용불량자가 돼 노숙생활까지 하게 된 수환, 교사생활을 하다 결혼하지만 곧 이혼하고 아들을 빼앗긴 뒤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한 영경. 술 때문에 생활이 마비돼 직장도 그만둘 수밖에 없었던 영경 앞에 수환이 나타났을 때, 영경은 그 순간을 이렇게 회상한다. 안산 외곽의 오래된 소형 아파트에서 혼자 살고 있는 여인을 담아낸 소설 '이모'의 삶도 어렵긴 마찬가지. 작품 '역광'에는 식사 후 커피잔에 소주를 부어 마시는, 알코올중독자로서 불안장애를 갖고 있을 것으로 짐작되는 신예소설가 '그녀'가 등장한다. 곧 허물어질 것 같은 '주정뱅이'의 아슬아슬한 내면을 서늘하게 포착하는 작가의 힘이 느껴진다.

'술'과 '설'을 넘나드는 단편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술자리에서 먼저 일어나자는 이야기를 해본적 없다고 고백하는 작가의 내공이 읽혀진다. 작가는 오영수문학상, 이상문학상, 동리문학상까지 수상했다. '한국문학의 특출한 성취'로 꼽히는 이유다. 이 소설집은 이해되지 않는, 그러면서도 쉽사리 잊히지 않는 지난 삶의 불가해한 장면을 잡아채는 선명하고도 서늘한 문장으로 삶의 비의를 그려낸다.

인생이 던지는 지독한 농담이 인간을 벼랑 끝까지 밀어뜨릴 때, 인간은 어떠한 방식으로 그 불행을 견뎌낼 수 있을까. 미세한 균열로도 생은 완전히 부서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 탁월한 감각을 발휘해온 권여선은 그럼에도 그 비극을 견뎌내는 자들의 숭고함을 가슴 먹먹하게 그려낸다.

신형철 문학평론가는 해설에서 "문학이 위로가 아니라 고문이어야 한다는 말도 옳은 말이지만 그럼에도 가끔은 문학이 위로가 될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고통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의 말이기 때문이고 고통받는 사람에게는 그런 사람의 말만이 진실하게 들리기 때문이다. 이번 책에서 권여선의 소설은 고통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의 표정을 짓고 있다. 요즘의 나에게 문학과 관련해서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한다. 창비. 1만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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