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사건의 진실을 폭로한 장편서사시 '한라산'의 이산하 시인이 두 번째 산문집 '피었으므로, 진다'를 펴냈다. '한라산' 이후 작가는 긴 수배생활 끝에 체포된 뒤 구속돼 옥고를 치렀다. 당시 그를 취조한 공안검사가 바로 지금의 황교안 국무총리이다. 고등학생 시절부터 산사여행을 시작했다는 작가는 수배 중에도 절을 찾아갔다. 산사에서 위로받고 깨닫고 성찰하는 과정에 '세월호 참사' 같은 사건과 '백구두를 신은 젊은 객승' 같은 사람의 이야기가 더해진 기행집이다. 금강스님이 주지로 있는 해남 미황사에서 첫 번째 이야기가 시작된다. 금강스님은 폐허가 된 미황사를 일군 장본인이다. 주민들은 황무지를 아름다운 산사로 변모시킨 금강스님을 가리켜 예불하는 시간을 빼곤 일만 한다며 '지게 스님'이라는 별명을 지어줬다. '물고문'이라는 별명도 붙었다. 등 떠밀려 주지가 된 뒤 세심당 차실에 앉아 차만 축내다 빈둥거리는 것처럼 보일까봐 아무나 잡고 차를 권하면서부터다. 청도 운문사는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통해 유명세를 탄 곳이다. 그는 운문사 진입로의 소나무를 "늘씬한 각선미의 여인들이 물구나무서기 하고 있는" 모습에 비유하고 "이화여대 앞 어느 란제리 가게 진열장에 도전적으로 배치된 스타킹 마네킹 다리를 보면서 운문사 소나무를 연상한 적도 있다"고 실토(?)했다. 그러나 시인은 "척박한 땅에서 일제의 벌목과 송진 적출까지 겪으며 무말랭이처럼 고통스럽게 비틀어져 있을 뿐이다. 설사 그렇더라도 여대 앞 속옷가게의 마네킹 다리에 비유하다니, 명품 '문화유산주의자'로서는 아주 고약하고 변태스러운 취향이 아닐 수 없다"고 꾸짖는다. 작가는 제주의 산방굴사를 오르내리면서 바라본 바다도 시인의 눈으로 그려낸다. "제주도의 날씨는 부서지는 파도의 거품만으로도 알 수 있다." 산방산 입구에는 여러 절이 모여 있어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그러나 시인은 다르게 평가한다. "절들이 여럿이 혼자 있다. 목적지는 같으나 가는 길이 서로 다르다. 최적화된 공존방식이다." 책에서 소개하는 마지막 절은 시인이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 가장 장엄한 법당'으로 명명한 팽목항 법당이다. 이곳에서 시인은 다시 미황사 주지 금강스님을 만났다. 시인은 팽목항과 같은 극한 상황에서는 "설사 부처님이 와도 침묵했을 것"이라고 했다. 금강스님은 세월호 침몰 이후 1년이 넘게 팽목항에서 목탁을 두드렸다. 정호승 시인은 추천사에서 "겉으로 보기에는 한 시인의 산사기행문이지만, 안으로 들여다보면 한 탐미적 허무주의 시인의 현란한 감성과 정제된 지적 사유가 돋보이는 섬세한 자기 내면 기록"이라고 평했다. 시인의 발자취를 더듬어 올 여름 휴가를 산사 기행으로 대신할 이들이 꽤나 있을 것 같다. 쌤앤파커스. 1만5000원. <저작권자 © 한라일보 (http://www.ihalla.com) 무단전재 및 수집·재배포 금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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