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굴 탐사 중 일행들과 휴식을 취하고 있는 부종휴 선생(맨 왼쪽) 사진=한라일보 DB '부종휴와 꼬마탐험대' 전설적 1947년 2월엔 만장굴 명명식 광복 이후 식물서 고고학까지 영역을 넘나들며 제주섬 누벼 한산(漢山) 부종휴 선생(1926~1980·사진)은 제주가 낳은 인물로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이자, 제주 세계지질공원 대표명소인 만장굴을 세상에 알렸다. 광복 이듬해인 1946년, 김녕국민학교 6학년 담임이던 부종휴 선생은 그의 제자들과 만장굴을 최초로 탐사해 이름을 명명하였고 만장굴의 실체와 태고의 신비를 세상에 처음 알렸다. 부종휴 선생은 1946년 김녕교 운동장에 모여 '꼬마탐험대' 발대식을 갖고 짚신과 횃불에 의지한 채 탐험에 도전하기를 수 차례. 위험을 무릅쓰고 숱한 우여곡절 끝에 1946년 10월 2일 만장굴 최종 지하 탐사에서 종점인 '만쟁이거멀'을 발견했다. 이듬해인 1947년 2월 20일에는 지상 '만쟁이거멀'과 지하 '만장굴'이 동일체의 굴임을 최초로 확인했다. 며칠뒤인 2월 24일에는 졸업을 앞둔 꼬마탐험대의 마지막 조회가 열린 모교 운동장에서 '만장굴(萬丈窟)' 이름 명명식이 열렸다. 명명식에서 꼬마탐험대의 대장 부종휴 선생은 상기된 얼굴로 단상에 올라 "1947년 2월 24일 오늘은 역사적인 날이 될 것입니다. 그대 이름은 '만장굴'이여!"라고 외쳤다. 이어 부종휴와 꼬마탐험대는 한 목소리로 "만장굴 만세"를 부르짖었다. 한라산 영실기암을 찾은 부종휴 선생 당시 같이 참여하였던 김녕교 30여명의 학생들의 꼬마탐험대 이야기는 지금까지도 전설처럼 남아있다. 만장굴 개척은 부종휴가 남긴 업적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부종휴 선생은 광복 이후 식물과 동굴, 산악, 고고학 등 다양한 영역을 넘나들며 제주 곳곳을 누볐다. 만장굴 외에도 빌레못굴과 수산굴, 서귀포 미악 수직굴 등 제주의 수많은 용암동굴들과 그 속에 묻혀 있던 고고·역사적 유물들이 세상에 알려진 것도 그가 일궈낸 개가였다. 그는 '한라산 박사'로도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정상만 350여회 등정하며 미기록 식물 등 한라산 자원의 개척자였다. 식물학자이기도 했던 그는 해방 후부터 1970년대까지 혼자 한라산의 식물을 조사하고 학계에 알렸다. 1400여종에 그쳤던 한라산 식물에 300여종을 새롭게 찾아냄으로써 오늘날 한라산을 2000여종이 자생하는 '식물의 보고'로 부각시켜 한라산천연보호구역 및 국립공원 지정에 견인차 역할을 했다. 지난 3월 '꼬마탐험대' 생존자들이 모교인 김녕초에서 만장굴 탐험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이처럼 부종휴 선생은 제주인으로서 한라산과 동굴 탐사를 비롯해 고고학, 산악활동을 넘나들며 근 1세기 동안 뚜렷한 족적을 남겼으나 사람들 뇌리 속에서 잊혀지고 있다. 기념관은 커녕 그의 삶과 업적을 기리는 흉상이나 전시관, 공적비조차 찾아볼 수 없다. 지난 7월 열린 부종휴 선생 재조명 심포지엄 다행히 지난 2015년 4월 '한산 부종휴선생 기념사업회'가 만들어져 기념물 건립과 업적 기록화 및 발굴사업 등이 추진되고 있다. 그의 업적을 기념하고 제주의 자연문화유산에 대한 보호활동과 제주도 연구사를 정립해 나갈 예정이어서 도민들이 거는 기대가 크다. <저작권자 © 한라일보 (http://www.ihalla.com) 무단전재 및 수집·재배포 금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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