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5년 제주도여성특별위원회가 펴낸 제주여성사 자료총서 Ⅵ '시대를 앞서 간 제주여성'은 언론·문화·체육 분야 인물 중에서도 가수 백난아를 가장 먼저 소개했다. 그 전까지만 해도 함북 청진 출신으로 알려진 백난아가 제주 출신이라는 사실이 이렇게 알려지면서 그 삶과 업적이 본격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한 시대를 풍미한 그는 한국가요사에 큰 획을 그었으며, 한국대중문화예술의 기틀을 마련한 선각자로 이름을 올리기에 충분하다. 백난아는 생을 마감하기 3년 전인 지난 1989년 1월 자신의 히트곡 53곡을 묶어 '백난아 히트애창곡집'(현대음악출판사)을 발간했다. 이 책에는 작사가 반야월, 작곡가 박시춘, 작곡가 손목인, 작사가 유호 등 한국가요계의 산 증인이었던 원로들이 '축하의 말씀'을 실었다. 그 가운데 손목인의 다음과 같은 글은 백난아의 명성과 인품이 어땠는지를 제대로 알려준다. "백난아! 그대 뜨거운 가슴으로 대중들을 사랑하였으니, 대중들 또한 고운 그대를 영원히 잊지않고 사랑하리라. 언제나 푸른 넋으로 살았고, 언제나 하얀 순정으로 견딘, 그대 백난아!" 불후의 명곡 '찔레꽃'… 한국인 가장 사랑하는 가요 100선 '낭랑 18세' 등 히트곡으로 한국 가요계 독보적인 자리매김 89년 '히트애창곡집' 발간·세 차례 고향 방문공연도 펼쳐 2005년 제주도여성특별위원회가 펴낸 제주여성사 자료총서 Ⅵ '시대를 앞서 간 제주여성'에 소개된 가수 백난아. 태평레코드사 전속가수로 본격 가수 활동을 시작한 오금숙은 이 때 가수 백년설로부터 백난아(白蘭兒)라는 예명을 얻게 된다. 불후의 명곡 '찔레꽃'을 취입한 것도 이 즈음이다. 이후 한국가요를 취급한 적이 없던 일본 킹레코드사에 발탁돼 일본에서 순회공연을 진행해 톱가수 대접을 받기도 했다. 태평양전쟁 말기에 접어들면서 물자부족 등으로 레코드산업이 전면 중단되는 위기를 맞았지만 백난아는 만주지방까지 공연을 다녔다. 그렇게 광복을 맞이한 후에는 충무로 3가의 일본인 집을 매입해 백난아양재학원을 설립하기도 했다.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나라 내 고향/ 언덕 위에 초가삼간 그립습니다. 자주 고름 입에 물고 눈물 젖어/ 이별가를 불러주던 못 잊을 동무야"('찔레꽃' 1절) 백난아가 1989년 1월 자신의 히트곡 53곡을 묶어 발간한 '백난아 히트애창곡집'. 광복 직후에는 백난아 외에도 급부상한 여가수들이 있었지만 레코딩 가수로서 성공한 이는 백난아가 거의 유일할 만큼 독보적이었다. 이후 럭키레코드에 전속된 백난아는 훗날 제주 출신 후배가수 한서경이 부른 '낭랑 18세' 등 인기곡을 발표하면서 인기를 유지했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활동을 이어간 백난아를 목격한 10살의 이미자는 훗날 피난시절 백난아의 공연을 보고 가수가 되겠다는 꿈을 품었다고 했을 만큼 많은 영향을 끼쳤다. 전쟁 후에는 직접 악극단을 조직한 백난아는 1956년 가수생활 15주년을 기념해 전국 순회공연을 시작했다. 백난아가 태어난 것으로 알려진 명월리 백난아 생가터. 백난아는 1957년과 1961년에 이어 1986년에도 고향을 방문해 한림문화관(옛 한림극장)에서 공연을 펼쳤다. 이 때 백난아의 고향 명월리 주민들도 이 공연을 관람했다. 명월리는 오씨 집성촌이기도 하다. '명월리지'는 백난아가 1956년(또는 1957년) 한림 공연에서 자신이 명월인임을 자랑했다고 기록해놓고 있다. 1988년 마지막 앨범 '이별의 술잔'을 취입한 백난아는 1989년 '히트애창곡집'을 발간한 뒤 말년에 제주시내 한 호텔 전속가수로도 활동했다. 그러나 암을 얻은 뒤에는 가족들 곁으로 돌아가 1992년 1월 65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백난아의 고향 한림읍 명월리 주민들이 중심이 돼 설립한 국민가수백난아기념사업회가 세운 '국민가수백난아기념비'. <저작권자 © 한라일보 (http://www.ihalla.com) 무단전재 및 수집·재배포 금지 > |
이 기사는 한라일보 인터넷 홈페이지(http://www.ihalla.com)에서
프린트 되었습니다. 문의 메일 : webmaster@ihalla.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