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부터 반세기동안 생각하는 정원을 가꾸는 농부로 살고 있는 '생각하는 정원'의 성범영 원장은 "정원은 우리사회 소통의 공간"이라고 말한다. 강경민기자 1968년 제주로 내려와 50년간 돌·흙 나르며 정원 가꿔 "개척정신 배워라" 장쩌민 방문후 中 관료들 방문 이어 중국과 나무로 맺은 인연 25년… "중, 소중한 이웃나라" "한국인의 정신 녹아든 세계 유일의 정원 만들고 싶다" "나는 내 손길을 기다리는 정원을 가꾸는 농부이자 생각의 뿌리에 물을 주는 정원사다. 50년동안 제주의 나무, 돌, 흙, 바람과 함께 하며 자연으로부터 배운 게 있다면 조화로운 삶이다." 제주시 한경면에 자리한 '생각하는 정원'을 가꾸며 스스로를 '농부'라 부르는 성범영(77) 원장. 20여년 전부터 한·중 민간외교를 제주에서 꽃피우며 중국에서 더 유명하고, 중국 교과서에 '한국의 현대판 우공(愚公)'으로 소개된 인물. 너나없이 힘겨웠던 1960년대 제주 중산간의 황무지에 나무를 심고 돌담을 쌓으면서 주변으로부터 '두루웨'(제주어로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사람') 소리를 들었다는 이다. 하지만 현재 3만㎡ 규모로 다듬어진 생각하는 정원에는 사람과 자연의 조화를 얘기하는 정원의 철학에 공감하고 돌·나무·분재·언덕이 빚어내는 조화에 감탄하는 해외 유명인사와 국내외 관람객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경기도 용인이 고향인 그가 제주를 처음 찾은 것은 1963년 군복무 시절 사귄 친구를 만나기 위해서다. 나무를 가꾸며 사는 삶을 꿈꿨다는 그는 배를 타고 찾은 제주 풍경에 곧바로 매료됐다. 그 후 서울에서 와이셔츠 공장을 운영하면서도 30여차례 제주를 오가다 모은 돈으로 제주 땅을 구입하고, 1968년부터 감귤밭을 가꾸면서 농장 한 쪽에서 분재를 기르기 시작했다. 정원 개척의 시작이었다. 2012년 정원에서 열린 한·중 수교 20주년 기념 행사. 수도도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중산간에서 맨 손과 곡괭이로 황무지를 개간하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구입한 나무를 심고 돌담을 쌓았다. 공사에 들어간 돌과 흙은 15t 트럭으로 약 1만대 분량이다. 늘 돌과 함께 살다 보니 발등에 돌이 떨어져 다치기 일쑤고 목과 허리를 다쳐 큰 수술도 여러 번 받았지만 그의 머릿속은 오직 나무 생각 뿐이었다. 그렇게 그의 삶이 녹아든 정원은 1992년 '분재예술원'으로 개원했고, 2007년 '생각하는 정원'으로 이름을 바꿔달았다. 단계적으로 조성된 정원은 관람로를 따라 환영의 정원, 영혼의 정원, 영감의 정원, 철학자의 정원, 감귤 정원, 비밀의 정원, 평화의 정원으로 이어진다. 변변한 설계도도 없이 시작했다지만 정원을 둘러보면 화산섬 제주에서만 볼 수 있는 화산석으로 정문과 울타리를 만들고, 제주의 오름을 정원 안으로 들여놔 완만한 언덕 능선 곳곳에 자리잡은 향나무와 분재와의 조화가 물 흐르듯 자연스럽다. 그 자연스러움엔 나무 하나를 심어도 어느 장소가 좋을지, 분재 대는 어느 높이로 세워야 좋은지, 활엽수인지 상록수인지, 열매의 색깔까지 염두에 두고 정원 전체의 구도를 해치진 않을지를 생각하는 그의 숱한 고민이 녹아있다. (사진 왼쪽)1995년 정원을 방문한 장쩌민 중국 국가주석이 정원을 둘러보고 있다. (사진 오른쪽)1998년 후진타오 중국 부주석 방문을 기념해 경북에서 150년 된 육송을 옮겨와 기념식수를 했다. 분재 강국인 중국과 그의 오랜 인연은 1995년 10월 정원을 방문했던 당시 판징이 중국 인민일보 총편집장이 11월에 인민일보에 쓴 정원답사기 '신병매관기'라는 글에서 시작된다. 판징이는 글에서 청나라 황제의 폭정과 획일적인 인재 양성을 비판하며 인공적으로 기형으로 만들어버린 병매(병든 매화) 분재에 빗댄 '병매관기'라는 책을 읽은 후 분재가 나무를 괴롭히는 일이라 여겼는데, 생각하는 정원을 만난 후 분재가 나무가 더 아름답게 자라도록 교정하는 예술임을 알게 됐다고 썼다. '신병매관기'가 인민일보에 실린 날은 장쩌민 중국 국가주석이 정원을 찾은 바로 그 날이었다. 1968년부터 돌무더기와 가시덤불 뿐인 황무지를 개간해 돌담을 쌓고 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성범영 원장은 2015년 중국 인민교육출판사가 발행한 '역사와 사회' 교과서에 한국정신문화의 상징 인물로 소개됐다. 사진=생각하는 정원 제공. 제주땅을 밟을 당시 20대 청년이던 성 원장은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가 됐다. 1998년 IMF로 관람객이 줄면서 경영위기에 맞닥뜨려 경매에 부쳐지고 7년동안 남의 손에 넘어가는 위기를 겪으면서도 정원을 돌보고 공들인 시간이 반세기가 됐으니 이제 다 완성됐을 법도 하다. 하지만 "내가 꿈꿔온 정원을 반밖에 만들지 못했다. 여전히 미완성"이라는 성 원장. "예술가의 상상력과 혼으로 빚어낸 예술작품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엄청난 위력을 발휘한다. 분재예술과 한국인의 끈질긴 정신이 빚은 세계에서 단 하나뿐인 정원을 만들고 싶다"는 그의 말처럼 정원은 오늘도 세계인들과 소통하며 쉼없이 다듬어지고 있다. <저작권자 © 한라일보 (http://www.ihalla.com) 무단전재 및 수집·재배포 금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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