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이 한창 핀 히로사키 공원 내에서 중국 후베이성 우한시 민간교류 사절단과 담소를 나누는 고바야시 마사루(小林 勝·왼쪽)씨와 노리오(範士·중앙)씨. 제주도와 일본 아오모리현은 모두 풍부한 자연의 혜택을 받은 곳이다. 각 지역의 자연자원을 보호하기 위한 노력은 과거부터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아오모리현 토오일보사와 제주도 한라일보사는 이번 회를 통해 각 지역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노력해 온 이들의 노력과 업적을 살펴본다. 1882년 아오모리현 히로사키 공원에 심어진 이후 135살을 맞은 일본 최고의 왕벚나무. 이 나무는 올해도 멋진 꽃을 피워 상춘객을 즐겁게 했다. 벚꽃의 대표격인 왕벚나무의 수명은 60~80년이라고 하지만 이 공원엔 수령이 100년 이상인 나무가 약 300그루에 달한다. 이 왕벚나무들은 많은 수령에도 매년 풍성한 꽃을 피운다. 고바야시 마사루(小林 勝) 씨가 수양벚나무인 니노마루오오시다레(二の丸大枝垂れ)의 뿌리에 올벚나무의 줄기가 제대로 활착한 것을 확인하고 있다. 마사루씨가 시도한 '뿌리접'이 성공함에 따라 뿌리 부식으로 쓰러졌던 니노마루오오시다레가 멋지게 부활했다. 벚꽃나무들이 생명력이 가득한 채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형제가 함께 고안해 낸 '히로사키 방식' 덕분이다. 히로사키 방식은 가지치기, 시비, 약품 도포 등 노리오 형제가 개발한 독특한 관리 기술을 가리킨다. 이 방식의 시초는 지난 1960년 당시 구도 나가마사(工藤 長政) 공원관리사무소장이 사과의 전정 기술을 벚꽃 관리에 응용한 것에서부터다. 형 노리오씨 벚꽃나무 쇠약원인 뿌리서 찾아 '외과수술' 동생 마사루씨 100살 넘은 수양벚나무에 '뿌리접'첫 시도 형인 노리오씨는 '벚꽃박사'로 유명하다. 그는 구도 소장이 퇴직한 이듬해인 1973년부터 벚꽃 관리분야에 종사해 왔다. 지난 1992년엔 당시 수령 80년으로 기세가 쇠하기 시작한 겹벚나무의 꺼져가던 생명을 되살렸다. 이를 위해 겹벚나무의 뿌리를 파내 병든 뿌리를 절단하는 외과수술을 감행했다. 사쿠라모리 멤버들의 관리로, 올해도 화려하게 꽃을 피우며 상춘객들을 매료시킨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왕벚나무와 그를 즐기는 상춘객들. 동생인 마사루씨는 1983년부터 시공원녹지협회의 직원으로 일하며 형 노리오씨를 지탱해 오고 있다. 마사루씨는 지난 2004년 4월 노리오 씨가 뇌출혈로 부득이하게 은퇴를 한 이후 노리오 씨 대신 히로사키 공원의 벚꽃을 지키고 있기도 하다. 마사루씨는 히로사키 공원 내 수령 100년이 넘은 수양벚나무 '니노마루오오시다레(二の丸大枝垂れ)'를 살려낸 바 있다. 지난 2011년 12월 '니노마루오오시다레'는 겨울에 내린 눈의 무게와 뿌리 부식을 견디지 못해 쓰러지고 말았다. 마사루씨는 형인 노리오씨가 가장 사랑한 이 벚꽃나무를 재생하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형에게 물려받은 기법을 구사하는 한편 나무의 뿌리를 재생시키기 위해 생물적으로 유사한(근연종) 올벚나무 묘목의 줄기를 연결하는'뿌리접'을 새롭게 시도했다. 2012년 11월 올벚나무 묘목의 줄기가 '니노마루오오시다레' 뿌리에 제대로 붙은 것이 확인됐고, 이 나무는 매년 건강하게 꽃을 피우고 있다. 2014년부터는 정년퇴직 후 재임용 된 마사루 씨를 필두로 식물의사 3인으로 구성된 '팀 사쿠라모리'가 발족됐다. 마사루 씨는 소나무, 단풍나무 등 총 8000그루의 나무를 관리하며 바쁜 나날을 보내면서도 '히로사키 방식'을 젊은 식물의사 2명에게 전수하고 있다. "우리 형제가 지금까지 해 온 일을 후세에 전달해야 한다"는 마사루 씨. 덕분에 히로사키의 벚꽃을 사랑하는 형제가 확립·발전시킨 관리 방법은 꾸준히 다음 세대로 계승되고 있다. 미우라 코헤이(三浦康平) 기자 ▶1976년생 ▶아오모리시 출생 ▶2000년 토오일보에 입사해 2016년부터 아오모리현 히로사키지사에서 상공·관광을 담당. 젊은 도련님들의 의기 벚꽃축제를 탄생시키다 히로사키 공원은 히로사키시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총면적이 약 49만 2000㎡에 달한다. 에도 막부시대에 히로사키 번을 통치한 쓰가루가(家)의 거점인 히로사키성 부지를 기반으로 왕벚나무 등 약 2600그루의 벚꽃을 비롯해 소나무 2000그루, 단풍나무 1100그루가 입장객을 맞이한다. 머지않아 벚꽃은 봄마다 화려한 꽃을 피웠다. 하지만 성곽 마을 히로사키시는 봉건적인 기풍이 강해서 "성에서 꽃놀이를 하는 것이 황송하다"는 분위기가 있었다. 때문인지 봄 꽃놀이 여행객의 대부분은 아키타현의 센슈 공원(千秋公園)과 도쿄의 우에노 공원(上野公園) 등 타 지역으로 몰려가곤 했다. 이 풍조에 바람구멍을 낸 것은 난봉꾼인 젊은 도련님, 자칭 '진보파'의 젊은이들로 구성된 '만사태평 클럽'이었다. 이들은 1916년 히로사키 공원에서 성대하게 꽃놀이를 하며 왁자지껄한 잔치를 벌여 시민들의 갈채를 받았다. 그들의 의기(意氣)에 히로사키 상공회가 답해 히로사키 공원의 벚꽃놀이가 이벤트화 됐다. 상공회 회원들이 사비를 들여 동서분주한 결과 1918년 제1회 히로사키 벚꽃놀이 모임을 개최하기에 이른다. 벚꽃놀이 모임은 1961년에 히로사키 벚꽃축제로 이름을 바꿔 현재에 이르고 있다. 히로사키 벚꽃축제는 올해로 100년째를 맞이했다. <저작권자 © 한라일보 (http://www.ihalla.com) 무단전재 및 수집·재배포 금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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