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을은 순환하는 육십갑자의 천간에서 순서대로 오는 기호에 불과하다. 그저 너와 나를 가리키는 대명사로 우위가 없다. 그런데 여기에 권력이 따라붙는다. 이제 단순히 순차적 차례만을 뜻하지 않는다. '갑'에 접미사 '질'을 붙여 '갑질'이라 하는데 느낌 그대로 조소가 섞여 들린다. 진정으로 그 사람의 본래 인격을 시험해 보려거든 권력을 쥐어 줘 보라 했다. 아이들이 어렸을 적 내 별명은 '팥쥐 엄마'였다. 한나절이라도 집을 비울 때면 여지없이 할 일을 쭉 늘어놓았기 때문이다. 일이라 해야 간단한 설거지, 빨래 널기나 개기, 자기 방청소였는데 우리 집엔 팥쥐는 없고 콩쥐만 있단다. 나름의 내 뜻과는 달리 아이들은 그저 놀기가 훨씬 좋을 테니 일 보따리 안은 콩쥐처럼 좀 억울했을 만도 하다. 우리도 갑·을이었을까. 을들의 소심한 반항이 담긴 별명. 갑인 나로선 그 별명을 즐겼던 듯도 하다. 어찌나 더운지 한낮의 더위는 입추를 지나고도 꺾일 줄 모른다. 최근 한 아파트 입주민이 자비를 들여 경비실에 에어컨을 선물했지만, 관리사무소와 다른 입주민들이 가동을 막아 무용지물이 되는 일이 있었다. 전기요금이 얼마나 나올지 알 수 없고 에어컨 없는 다른 경비실과의 형평성에도 맞지 않는다는 이유 같지 않은 이유가 붙었다. 그 형평성, 있기는 한가. 작년엔 서울지하철 2호선 구의역 내선순환 승강장에서 스크린도어를 혼자 수리하던 외주업체직원이 열차에 치이는 사망사고가 있었다. 나어린 비정규직 청년의 죽음이 단순한 개인 과실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열악한 작업 환경과 관리 소홀 때문이라고 많은 이들이 가슴 아파하는 가운데 "어떻게 내 자식처럼 생각되나. 그렇게 말하는 건 위선"이라고 한 이가 있었다. 참으로 솔직하게 몰염치하다. 상위 1%를 꿈꾼다는, 평생이 갑 만이었던 그로선 상상도, 공감도 안 되는 일일 수도 있겠다. 놀랍지만 당연한 말씀이시다. 다시, 공관병이 '아들 같아서' 노예처럼 부린 대장님 내외가 유명세를 타고 계시다. 그 속을 들여다보자니 어이상실에 참담하다. 사병(士兵)을 사병(私兵)으로 부린 것도 모자라,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시키는 대로 하라고 윽박질렀다니 참, 금쪽같은 아들이다. 갑질 이상의 위법행위인데 정도 차이가 있을 뿐 관행이라니 군 미필자인 나로선 상상초월이다. 분배정의에 실패한 승자독식 문화의 투철한 계층의식, 대접받지 못하면 쉽게 분노하는 약한 자존감, 불법과 불공정한 부당행위에는 무감하지만 넘치는 자기애. 사람을 등급화하고 나눠서 아래 등급을 무시하며 얻는 천박한 자기위안. 이들이 그리는 가족사진엔 아버지 같은 경비원, 아들 같은 공관병, 딸 같은 인턴, 조카 같은 알바, 동생 같은 운전수, 며느리 같은 가사도우미, 손녀 같은 캐디가 있다. 새로운 신분제도로 부활한 갑을병정엔 군림하는 갑, 비위 맞춰야 하는 을·병·정이 있을 뿐 절대로 가족은 없다. 가끔 사물 존칭을 듣는다. 갑에게 책잡히지 않으려는 을들의 비굴한 긴장감이 말 속에 극대화된 건 아닌가싶어 씁쓸하다. 착취체계를 틀어쥔 관리자가 되거나 무조건 순종하는 노동자가 돼야만 한다면 그 누구도 행복해질 수 없다. 우리는 때로 을이다가 때론 갑이다. 피해에는 민감하지만, 가해에는 둔감하다. 맞은 사람은 있지만 때린 사람은 없다. 자기성찰이 필요한 지점이다. 어제의 을인, 오늘의 갑들에게 미셸 오바마의 한마디는 어떨지. "저들이 낮게 가더라도, 우리는 높이 갑시다! 저들이 비열하게 나와도, 우리는 품위 있게 갑시다" <김문정 시인> <저작권자 © 한라일보 (http://www.ihalla.com) 무단전재 및 수집·재배포 금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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