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귀포시 대정읍에 위치한 추사관은 제주서 귀양살이를 한 추사 김정희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다. 사진은 추사관 내부 모습. 강희만기자 방송 후 입소문 타고 하루 600명 가량 방문 상설전시관 '세한도' 등 유물 100여점 전시 400평이 채 되지 않는 작은 규모지만 일일 방문객이 600명에 달하는 기념관이 있다. 최근 인기 방송 프로그램에서 소개된 후 그야말로 '핫플레이스'가 된 제주추사관(서귀포시 대정읍 추사로 44)이다. 24세에 생원시험과 34세에 문과에 급제한 후 규장각 대교·의정부 검상·예조참의·형조참판을 거치며 탄탄대로의 삶을 살다 세도정치의 틈바구니에서 화를 입어 제주에서 귀양살이를 한 추사 김정희. 굴곡진 삶을 살았던 그였기에 '세상에는 추사를 모르는 사람도 없지만 아는 사람도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몇몇 업적의 단면만으로 평가하기 힘든 인물이다. 제주추사관은 다채로운 전시품을 통해 그런 그의 삶 면면을 들여다볼 수 있어 매력적인 공간이다. 기념관 외관을 국보 제180호인 '세한도'와 똑같이 구현해 내 눈길을 끈다 제주추사관은 3개의 전시관과 추사기념홀, 교육실, 수장고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부국문화재단, 추사동호회 등에서 기증한 ‘예산김정희종가유물일괄’, 추사 현판글씨, 추사 편지글씨, 추사 지인의 편지글씨 등을 전시하고 있다. 지하 상설전시관에 전시된 100여점의 유물 대부분은 기부를 받아 전시되고 있다. 수많은 전시유물 중 가장 눈에 띄는 건 단연 '세한도'다. '세한도'는 추사가 제주 유배 중일 당시 제자인 우선 이상적이 책을 보내준 데 대한 보답으로 그려준 그림이다. 메마르고 거친 필치로 표현된 화면에서 느껴지는 차갑고 황량한 분위기는 발문에 쓰여 있는 "날이 차가워 다른 나무들이 시든 뒤에야 비로소 소나무가 늘 푸르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구절과 잘 부합된다. 제주추사관의 '세한도'는 일본 추사 연구가가 1939년 복제해 만든 한정본 100점 가운데 한 점이다. 초가집으로 지어진 추사 유배지 주변. 전시관 출구를 따라 나오면 초가집으로 지어진 추사의 유배지를 둘러볼 수 있다. 제주유배 당시 추사에게 내려진 형벌은 '위리안치'로 집 주변을 가시울타리로 둘러 집 안에서만 기거해야 하는 중형이었다. 정낭(제주 특유의 대문)을 지나 추사가 거주하던 집 안으로 들어가면 말방에(연자방아), 쉐막(외양간)이 보이고 그 옆으로 밖거리(바깥채)가 있다. 밖거리는 추사가 마을 청년들에게 학문과 서예를 가르쳤던 곳이다. 추사에게는 문하생이 많아 '추사의 문하에는 3000의 선비가 있다'라는 말이 있었을 정도로 추사는 제주에서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제주 선비들 입장에서는 뛰어난 선생을 얻은 것이었다. 추사는 지역 유생들에 글을 알려주고 제자가 필요한 책을 직접 구해줄 정도로 열정을 보였다고 전해진다. 추사가 유배시절 대정향교에 써준 현판인 '의문당'도 추사와 제주지역 유생 간의 교류 흔적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대정향교는 추사 유배지에서 2㎞ 떨어진 단산 아래에 위치해있다. 추사 유배지까지 둘러보고 나면 제주추사관 탐방은 끝이 난다. 제주추사관 관계자는 "방송 전 일일 300여명에 그쳤던 방문객 수가 방송 후 두 배로 늘며 추사의 흔적을 만나려는 이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고 있다"며 "자세한 설명을 듣고 싶은 이는 사전에 문화해설사와의 탐방을 예약하면 된다"고 설명했다. <저작권자 © 한라일보 (http://www.ihalla.com) 무단전재 및 수집·재배포 금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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