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현대사의 최대 비극 '제주4·3' 70주년 맞이하지만 실체적 접근은 미흡 분단체제 극복 지향… 오늘날도 유의미 제주4·3이 70주년을 맞이했다. 4·3은 대한민국 현대사 최대의 비극이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야할 국가 권력에 의해 수많은 인명피해를 낳았다. 무려 3만 명에 이르는 무고한 사람들이 영문도 모른 채 스러져갔다. 엄청난 물적 피해는 물론 마을공동체도 여지없이 파괴됐다. 비극 속에서 용케 살아남아 견뎌온 4·3둥이들은 올해가 칠순이다. 팔십, 구십이 가까운 생존자들은 마지막 생애주기일 수도 있다. 그들에겐 70주년의 의미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매해 연례행사처럼 맞이했던 4·3의 무게감과는 다르다. 70주년이 된 4·3의 역사적·현재적 의미를 되짚어보는 이유다. 제주4·3의 발발원인은 한 가지 이유로만 설명할 수 없다. 2003년 확정된 정부 진상조사보고서도 복합적 요인이 작용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면서 4·3은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서청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선·단정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라 규정했다. 진상보고서 확정 당시 신고된 희생자 수는 1만4028명이다. 이중 군인 경찰 등 토벌대에 의한 피해가 78.1%(1만955명)나 됐다. 무장대에 의한 피해는 12.6%(1764명)로 나타났다. 특히 전체 희생자 가운데 10세 이하 어린이가 5.8%(814명), 61세 이상 노인이 6.1%(860명)였다. 여성은 21.3%(2985명)에 달했다. 단일사건에서 엄청난 인명피해가 무차별적으로 발생한 것은 문명국가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70년이 흘렀음에도 4·3은 여전히 청산되지 못한 역사로 남아있다. 사건의 진상과 전개과정만 드러났을 뿐 실체적 접근은 미흡하다. 희생자 배·보상 문제를 비롯 불법적인 군사재판으로 인해 희생당한 수형인들의 명예회복 또한 이뤄지지 않고 있다. 4·3평화기념관 전시실내의 백비는 올바른 이름도 갖지 못한 채 외로이 누워있다. 한편에선 이념적 잣대를 들이대면서 불온시하는 분위기도 여전하다. 이처럼 4·3의 완전한 해결은 아직도 갈 길이 멀다. 4·3은 끝나지 않은 비극이자 진행형의 역사다. 억울하게 죽어간 희생자들을 신원하고, 유족과 도민들을 위로하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4·3 해결과정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이뤄져야 함은 물론이다. 그렇지만 이게 전부가 아니다.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4·3의 본질적 의미와 정신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그래야 4·3은 과거의 박제된 역사에서 한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 4·3은 과연 무엇이었나. 해방공간에서 분단체제가 들어서는 과정에서 4·3은 남한만의 단독선거·단독정부 수립 반대를 기치로 내걸었다. 통일을 지향한 외로운 저항이었다. 이후 분단체제는 고착화됐고 냉전체제는 더욱 강화됐다. 70년간 이어진 분단체제는 오늘날까지 한국 사회를 짓누르고 찢어놓는 모순의 집약이다. 이를 극복해야 우리 사회가 분열과 갈등, 대립에서 벗어나 온전히 나아갈 수 있다. 4·3의 본질적 의미와 과제는 이러한 분단체제 극복을 지향하는데서 찾을 수 있다. 이는 4·3의 완전한 해결과도 상통하는 것이기도 하다. 70주년이 비극의 역사를 청산하고 화해와 상생, 평화와 인권, 통일의 새로운 미래를 열어나가는 전환점이 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정부의 해결의지는 중요하다. 70주년 4·3의 의미를 되새겨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윤형 선임기자 <저작권자 © 한라일보 (http://www.ihalla.com) 무단전재 및 수집·재배포 금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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