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을 검은 색과 붉은 색으로 기억한다. 15년 전쯤 기자 초년병 시절, 선흘 동백동산 현장을 찾았었다. 당시 목격한 이미지는 현무암 지대와 빌레(돌밭)에 위태롭게 선 동백나무의 형상이었다. 제주의 척박한 검은 대지 위에 붉은 동백꽃들이 유난히 많이 떨어졌던 모습이 선명하다. 그날 행사는 현장위령제인 것으로 안다. 그 때의 기억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김경훈 시인의 굵직하고 깊게 패인 목소리로 읊는 처절한 시어가 귓가에 닿으며, 빌레 밑 동굴에 숨었다가 나오는 동네 형들과 친구들의 이름이 하나둘 불려졌다. 허나, 처참하게 난사를 당했다는 그의 말에 귀가 먹먹했다. 그리고 당시 표현은 '마치 두더지 잡듯'이었다. 아이들 조차도 쉽게 드나들기 힘들 정도로 좁은 통로로 숨은 사람들을 동굴 밖으로 나오도록 하기 위해 토벌대는 불을 붙여 동굴에 던졌다는 것이다. 도망가는 사람을 총으로 쏘고, 잡힌 사람들을 다시 현장에서 한 곳에 모아 총살했던 그 끔찍한 역사의 땅이 바로 동백동산이라는 것이다. 동백동산뿐인가. 제주사람 사는 곳 모두가 4·3의 아픈 역사를 가진 곳이다. 제주공항도, 북촌리도, 의귀리도, 그리고 대정읍 상모리 섯알오름도 모두가 아픔의 땅이다. 성산일출봉 터진목도 희생의 현장이다. 성산에 사는 한 시인은 4·3 당시 아버지가 희생당한 바닷가, 바로 앞에 집을 짓고 그 곁을 지키며 산다. 아픈 가족사가 있지만 고향을 떠날 수는 없다고 했다. 잔인했던 4월엔 벚꽃도 핀다. 붉은 피를 흘리는 희생자들 한분한분이 떨어져 누운 동백꽃이라면, 벚꽃도 지난 겨울의 혹독한 시련을 견뎠기에 더 짙은 붉음으로 피어난다. 그래서 제주에서는 꽃을 아름다운 꽃으로만 봐서는 안된다. 4·3 70주년이다. 섬 곳곳을 돌 때, 그리고 꽃을 들여다 볼 때, 세월의 더께 밑에 서서히 묻혀가는 진정한 4·3의 희생과 아픔의 이유를 알았으면 한다. <백금탁 교육문화체육부 차장> <저작권자 © 한라일보 (http://www.ihalla.com) 무단전재 및 수집·재배포 금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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