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개 작은 섬으로 구성된 팽호 제도 보름넘게 바다 떠돌다 8명 구사일생 해양신 모셨을 마궁 아문 모습에 감탄 오늘날 천후궁도 향피우며 안녕 기원 제주 북촌 사람 이방익은 뜻하지 않게 그 섬에 갔다. 정조 때인 1796년 9월 제주에서 배를 띄웠다 풍랑을 만나 팽호까지 떠밀렸다. 이방익 일행은 지금의 대만, 중국을 거쳐 약 9개월 뒤 조선으로 돌아왔다. ▶어업·관광업으로 먹고 살아=대만 서부 팽호 제도는 제주에서 약 2400㎞ 떨어진 곳이다. 64개의 작은 섬으로 이루어졌는데 그중 44개가 무인도다. 연평균 기온 27℃로 '팽호'란 시처럼 바람부는 날이 많다. 어업만이 아니라 관광업으로 먹고사는 섬으로 팽호는 곧잘 예술작품의 무대로 등장한다. 어릴 적 바람 살살 부는 팽호 포구를 추억하는 대만 가요인 '외할머니네 팽호만'은 중국 사람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노래다. 천후궁 내부에 전시된 마조신앙 전파경로를 담은 지도. 명대 이래에는 중국과의 밀무역을 위해 일본인들이 팽호를 찾았다. 17세기 중반에는 38년동안 네덜란드 점령기가 이어진다. 1884~1885년 청·불전쟁 발발 직전에는 프랑스군이 팽호를 점령했다. 청나라가 청·일 전쟁(1894~1895년)에서 패한 뒤엔 일본에 팽호를 넘겨준다. 일본에게 팽호는 중국 침공을 위한 교두보였고 그렇게 50년을 지배한다. 이방익이 표착했을 무렵 팽호는 200년이 넘는 청조 통치기(1683~1895)였다. ▶"채선 위 누각에 단청이 영롱하다"=낯선 땅 팽호에서 이방익 일행이 처음 마주한 관리는 마궁대인(馬宮大人)이었다. 천후궁 전경. 마조신은 대만해협을 사이에 두고 있는 중국 복건의 영향이 크다. 팽호 역시 예로부터 복건인이 이주해온 역사를 품었다. 팽호 본섬 마공시 원도심에 남아있는 화려한 외양의 '팽호 천후궁(天后宮)'이 이방익이 봤던 마궁은 아닐까. 안내판에는 이 곳을 마조궁이나 마궁으로 부른다고 적혀있었다. 마궁은 마공시의 옛 지명이다. 천후궁은 팽호에서 가장 오랜 마조궁으로 3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녔다. 복건 미주서(湄州嶼) 출신 임묵(林默)이 본명인 마조신은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삼는 어부들의 기도가 효험을 보이며 차츰 신격화되었다고 전해진다. 만일 이방익이 이 천후궁을 찾은 거라면 험한 바닷길을 살아 건너온 그에겐 그 의미가 더욱 각별했다. 지난 4월의 천후궁은 도심 휴식처처럼 시민과 관광객들로 북적였다. 건물 안에선 발소리를 낮춘 채 저마다 향을 피우며 무언가를 빌고 있었다. 그들은 바닷길의 안녕만이 아니라 가족과 사랑하는 이의 건강과 행운을 기원하고 있으리라. ▶팽호의 역사에 등장하는 이방익=마궁대인을 만난 이방익은 '어디 사람이냐'는 질문을 받자 '조선국 전주부'사람이라고 답한다. 천후궁에서 간절히 기원하는 사람들. 이방익과 팽호의 인연이 두드러지게 새겨진 곳은 마공시에 있는 팽호생활박물관이었다. 팽호의 역사를 시대순으로 소개한 전시물에 이방익이란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1796년 청 가경원년 조선 이방익 등 8명이 바람을 만나 팽호로 표류한 뒤 다음해 고국으로 돌아가 '표해가'를 지었고 이같은 행적은 특수한 경험이다'는 짤막한 글귀였지만 그 섬의 역사에 자리잡은 이방익의 존재를 짐작하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이방익은 팽호 제도 어느 섬에 표착했던 것일까. 취재팀은 그 흔적을 더듬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자문위원=권무일(소설가) 심규호(제주국제대 교수), 글·사진=진선희기자> 표류끝 살아남은 자들의 극적 회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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